가치관을 기준으로 한 AI 매칭 시스템을 통과한 이 남자와 2주 정도 어플과 카톡으로 대화를 했다. 우리의 대화는 아주 깊은 수준까지 들어갔다. '사진'이 공통점이었던 우리는 초반부터 각자가 찍은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캐나다의 햇살에 대해서 얘길 나누다가, 각자 유학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이야기 등으로 옮겨갔다. 대화창이 열리고 나서 맞이한 첫 주말, 이야기가 반나절이 지나도록 끊이질 않았다.
형형님은 캐나다 왜 가셨어요? 그러는 루이제 씨는 일본에는 어떻게 공부하러 갔어요? 그렇게 외국에 사는 일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 타지에 살며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경험 등을 나누었다.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스스럼없이 꺼냈다. 각자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까지도 나누었다. 솔직히, 남녀가 만나기 전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까지 나누었다면... 말 다 한 것이지 않나. 나도 얼굴도 보지 않은 사람에게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솔직해질 수 있나 싶어 놀랄 정도였다. 물론 이건 그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일 것 같아서, 그런 느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카톡창 너머로) 잔뜩 풍겨서 가능한 일이었다.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한 날, 우리는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하게 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2020년 4월의 어느 날이었다.
2주 간 온갖 비대면 딥토크를 마치고 이미 서로에 대한 파악이 끝난 우리에게 첫 만남은 둘 사이의 케미를 '최종 확인'하는 절차에 가까웠다. 여러 퀘스트를 깨고 끝판왕을 만나는 느낌. 첫 만남인데 벌써 끝판왕이라니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기분이 정말 그랬다. 나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Rosso)> 일본어 원문 소설을 연출 삼아 펼쳐놓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키가 큰 남자가 유유히 걸어오는 모습을 흘깃 훔쳐봤다. 아, 저 사람이구나. 그레이 재킷을 입고 빈티지한 브라운 계열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다. 스타일에 맞게 걸친 안경도 잘 어울렸다. 내 자리에 다가와 앉더니 마스크를 벗고는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며 웃는데, 마음속에 착 깔리는 이 안도감. 아니 이건 끝났다.
그가 나중에 말해주었는데, 처음 나를 만난 순간 머릿속으로 든 생각도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아, 됐다(성공이다).'
가치관이 맞는데 외모까지 맘에 들었다니, 게임 끝 아닌가.
원래는 커피나 한 잔 하려고 아주 애매한 시간(무려, 오후 3시)에 카페에서 잡은 약속이었다. 막상 만났는데 아니면 단호하게 갈 길 가야 하지 싶은 마음에(...) 아니, 원래 효율성을 중시하는 MZ세대는 카페 소개팅이 많다고 하지 않나. 설상가상으로 이 사람, 앉은 지 5분 만에 커피를 원샷을 해버린다.
아니, 커피를 벌써 다 드신 거예요? 네, 제가 뭐든 좀 빨리 먹고 빨리 마셔서요. 커피를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커피를 다 마셔버리니 카페에서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나름 1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카페에서 나눈 얘기들은 지금 시점에선 하나도 기억에 나지 않는다.
날씨도 좋은데 좀 걸을래요?
우리는 성수동에서 버스로는 2 정류장 정도 떨어져 있는 어린이대공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벚꽃이 만개한 산책로를 걸으면서 또 온갖 이야기를 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사를 늘어놓았다. 개중에는 자기의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개인 가정사도 있었다. 처음 만난 데이트 상대에게 불리한 인상을 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경쾌하고도 투명하게 털어놓는다니,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해한 데다 유쾌하고, 매력 있는 남자였다.
그렇게 2시간 정도 걷다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4월이지만 초봄인지라 해가 떨어지면서 점점 볼에 와닿는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는 남자 옆에서 아직은 나를 어디까지 보여줘야 할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게, 그가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