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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May 28. 2023

받지도 않은 선물을 뺏긴 기분이야

처음 만난 그에게 '오빠'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했을 때

소개팅으로 만난 지 3시간 만에 치맥을 먹자는 그의 제안에 우리는 어린이대공원 근처 모던통닭집에 들어갔다. 치킨을 뜯으며 그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던 찰나, 또 다른 제안이 훅 하고 들어왔다.



- 근데 우리, 말 놓을래요?


- (1초 만에) 그래!



말을 놓는다는 것에 대한 가치관도 비슷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사람과 진정 친해지려면 말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말의 높임법, 존대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롯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 그간 살면서는 어떤 연애를 해왔어?



치킨 그릇이 바닥을 보일 때쯤 호기롭게 나는 질문했다. 그러자 그의 일장연설이 이어졌다.



- 연인은 제1의 절친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데이트 상대는 있었지만 절친이자 연인인 사람은 없었어. 그동안은 1년이 넘지 않는 짧은 연애만을 해왔어. 관계를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해.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식이 다르겠지만, 나는 그래. 예전에는 내게 그런 의지가 없었어. 그런데 이 의지라는 게 생기고 나서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더라. 그런데 또 아무나 만나긴 싫으니까. 연애 안 하는 상태로 시간이 오래 흘러버렸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어떤 질문을 해도 정돈된 대답이 막힘없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자기만의 생각이 차곡차곡 정립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던 것 같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단순 나열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닥친 일들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잘 소화해 내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자기만의 생각 서랍이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질문 퍼레이드는 계속 이어졌다.



- 자기 삶에 만족해?


- 응. 나는 내 삶을 사랑해. 내 일상이 좋아. 사진 찍는 내 일이 좋고 즐거워. 좋아하는 친구들이 내게 먼저 연락해 주고 안부 물어주고, 이런저런 것들 보내주고 공유해 주고 그런 것도 행복해.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본 적이 잘 없었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낯선 설렘이 일렁거렸다.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자기 삶의 만족도에 대해 유쾌하고 명료하게 대답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나 또한 좋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열어둔 창 틈새로 햇볕이 스미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치킨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니 시간은 어느덧 저녁 9시 언저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를 일찍 보내기 싫은 이 기분 뭐지? 그도 아직은 집에 가기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길 건너 던킨 도너츠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거기서는 내 전공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자기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가 귀여워 보이면 끝이라던데. 그렇게 만난 지 6시간 만에 출구 없는 길목에 들어서버린 것이었다.


카페 폐점 시간(10시)에 가까워지자 우리는 다시금 길거리로 나왔다. 이제는 진짜로 집에 가야만 했다. 버스 정류장으로 그를 데려다주는 길목에 나는 자연스럽게 폭탄선언(?)을 했다.



- 근데 한 가지 알아둬야 될 점이 있는데, 나는 오빠라는 말은 잘 못 해. 친오빠 외에는.



그는 나보다 2살이 많았다. 나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엄청 만득이처럼(?) 변하더니 반쯤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반쯤은 웃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 헐~! 네가 그런 얘기를 하니 왠지 받지도 않은 선물을 뺏긴 기분이야! '오빠'라는 용어에 대한 한국남자의 집착은 결국 인정투쟁이잖아.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귀엽고 웃긴 상황이었다. 그래...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난 오빠라는 말은 간지러워서 못 해...라고 일축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서서 우리는 이 인정투쟁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타야 할 버스를 한 2대는 족히 보낸 것 같다.



- 루이제야, 네가 '비위 맞춰줄 줄 모른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이 그럴 필요가 없었던 특권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야. 애교는 2등 시민의 것이라는 말도 있잖아.



치킨을 먹으면서 나는 사람 비위 맞춰줄 줄 모르고, 애교가 없다는 멘트를 날리기도 했었다. 이렇게 사회학적 배경을 정확히 꼬집는 그를 보며 똑똑한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맞다. 나는 비록 여성이긴 하지만, 여러 특권 또한 가지고 있는 교차하는 정체성의 소유자였다. 어떻게 알았지. 예리하구나 이 놈.


그러면서도 그는 180 넘는 체격의 남자(자기)는 154의 여자애보다 이 사회에서 훨씬 더 편하게 살 수 있음이 분명하다는 말을 하는, 아주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키 큰 남자(외적인 승자남성)가 이런 얘기를 자기 입으로 하는 것도 처음 들어봤다. 무언가를 처음 듣는 일이 아주 많은 날이었다. 마음이 아주 분주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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