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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May 28. 2023

사귀기 전부터 결혼을 결심한 이유

앞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을 안 해?

그를 세 번째 만났던 날에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혹시 금사빠야?


- 나 금사빠 맞아. 앞에 사랑할 만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사랑을 안 해? 너무 이상하지 않아?



24살, 이른 나이에 엄마에게 결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한 나에게 결혼이란 아주 머나먼 주제였다. 결혼 거부란 내게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선언과도 같았다. 그렇게 주류를 거부하며 살다가 저항만이 답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나이, 정확히는 서른 살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사랑을 안 할 수 없는, 아니 정확하게는 '결혼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를 말이다.


사귀기 전부터 우리는 결혼과 육아 등에 대한 대화도 아주 깊은 수준까지 들어갔었는데, 한 번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 애는 낳고 싶어?


- 나는 기본적으로는 딩크야. 아이를 낳는 주체는 여성이잖아. 임신과 출산의 지난한 과정을 어쨌든 몸으로 겪어내야 하잖아. 그런데 남자인 내가 아이를 원한다, 또는 아니다라고 미리 정해놓고 말하는 건 좀 그래. 아이 문제는 내 아내 될 사람이 원하면 그때서야 생각해 보는 거라고 생각해.



여기서 문제는, 나는 그가 아이를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애기 그림자만 나타나도 좋아서 헤죽헤죽거리고 사족을 못 쓰던 사람. 아이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데면데면한 나와 달리, 몇 시간이고 애랑 신나게 놀아줄 줄 아는 사람이 이런 대답을 할 줄 안다니 이 모순성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때였던 것 같다. 어렴풋이 이 남자랑 결혼까지 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사귀고 난 뒤 첫 데이트는 노들섬에서였다. 선거날이었다. 손을 잡고 걷는데 그가 이렇게 얘기했다.


- 너랑 있으면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어서 좋아. 여자들 중에서도 마초적인 거 원하는 사람들 있거든. 남자답게 행동하길 바라고. (그렇지. 특정 남성성을 요구하는 거 정말 싫을 것 같아.) 응 싫은 것보단.. 나다운 느낌이 안 드니까.


- 난 항상 너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취향이 같은 사람. (취향이 같은 게 뭔데?) 음. 무슨 말을 해도 바로 말이 통하고. 그리고, 인권 감수성 있는 사람. 네가 말했듯, 약자와 소수자를 향하는 사람.





사귀고 나서 초반에 이런 띵언들을 아주 숨 쉬듯 날려대는 바람에 나는 뇌도 손도 아주 바빴다. 문장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데이트가 끝나고 집에 와서는 브런치 임시저장함에 그가 했던 말들을 잔뜩 저장해두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봄에 만난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 나갔더니 벚꽃이 소리소문 없이 만개해 있는 것처럼, 서로에게 순수하게 감탄했고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우릴 만나게 해 준 소개팅 어플 '튤립(2ulip)' 개발자분께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물론 연애라는 것은 잠깐 피었다 지는 봄꽃이 아니고, 네 번의 계절을 지내보아야만 상대를 어느 정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만나고 헤어졌던 무수한(?) 남자들처럼 그가 한갓 연애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일찍이 깨달았다.


연애 초반에 친구들이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섬세하지만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그를 설명했다. 그는 10대 때부터 글을 쓰고, 사진을 전공하고, 미학을 공부하는 등 조용히 예술적 감수성을 키워오면서 섬세한 감각들을 지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한 어린아이 같고 보통 남자들만큼이나 무딘 사람이었다. 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누구보다 섬세한 각도와 위치로 조명을 치곤 하지만, 일상에서는 가드를 내리고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 그가 지닌 그런 적당한 선이 좋았고, 삶의 창들을 다양하게 내어놓은 모양새가 좋았다.


섬세하면 예민해지기가 쉽다. 그러나 그는 내가 딱 원하는 정도의 섬세함, 기꺼이 참을 수 있는 만큼의 예민함을 갖추고 있는 마술사 같았다. 스스로가 원체 예민한 사람이기에 너무 예민한 상대와 있으면 쉽게 피곤해지곤 했다. 일본유학을 끝내면서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서인지 내 몸은 작은 일에도 아주 예민해져 있었는데, 과장을 좀 보태면 자다가 침대가 조금만 움직여도 지진이라고 착각했고 몸에 염증 하나만 생겨도 스스로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그 사람과 있으면 뭐든 쑥쑥 소화도 잘하고 잠도 쿨쿨 잘 잤다. 인생이 아주 흔쾌하고 시원시원했다.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이 글에 이야기된 것들, 그리고 이야기되지 않은 모든 것들까지 총망라해야만 꺼내놓을 수 있는 주제다. 이 사람과 왜 결혼했어?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단순하게 대답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이 연재글에서 꺼내놓을 스토리들이 아직 산처럼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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