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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Jun 18. 2023

설렘보다 편안한 연애가 좋아질 때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정립하다

우리 사이에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건 연애 시작 후 3~4개월 남짓 지났을 시점이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 갑자기 그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까지는 결혼제도에 대해서 크게 생각이 없었던 나는 틈날 때마다 그에게 질문을 던져 시험하려 했던 것 같다.



- 결혼이란 뭐라고 생각해?


- 징글징글하지만, 이 사람이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징글징글하다는 표현에는 거부감이 들면서도 묘하게 끌리는 데가 있었다. 징글징글할 만큼 누군가와 세월을 같이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이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연애 초반의 설렘은 금방 사라진다. 소름 돋을 만큼의 긴장감, 낯선 상대에 대한 호기심은 길게는 몇 달을 넘기지 못한다. 과거 편안한 연애 속에서 권태를 느낀(새로움을 갈망한) 적이 많았던 나는 예전에 이런 개념이 와닿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사랑이란 생활이라는 걸, 매우 구체적인 개념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이서희 작가의 <구체적 사랑>을 읽고 나서였던 것 같다.



가슴 뛰는 조우와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힘이 세다. 하지만 그것의 부재가 예전만큼 쓸쓸하거나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두렵지는 않다. 연애세포를 날뛰게 하고 일상을 뒤흔드는 만남보다는, 좀 더 성숙한 단계로 나아가는 관계에 더 흥미를 느낀다. 만일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쓴다면 기존의 사랑을 폐허로 만드는 절대적 낭만 위에 세워진 이야기가 아닌, 꾸준히 복구하고 다듬고 삶의 성숙과 함께 이뤄가는 어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 (121p)





서른 살 무렵, 사랑이 낭만적 서사에만 기댈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나이였다. 부서질 만큼 감정을 쏟고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나는 일은 스스로를 갉아먹었다. 하트시그널 시즌3 출연자 김지영 씨의 말('설레는 연애보다 편안한 연애가 좋다고 생각한다')이 잔잔하게 마음을 울렸던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편안함의 힘은 그 어떤 설렘보다 더 강력하다.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에서 나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은 만족과 안정감을 준다. 예컨대 대지 같은 것. 붕 떠있는 느낌, 불안감을 소거하는 것. 그것이 결혼의 핵심이었다. 안정이라는 말을 극도로 혐오했던 어린 날의 나는 그 단어가 주는 어떠한 종류의 의무감이 싫었던 것 같다. 결혼제도에 갇혀 '평생 그 사람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두려웠고, 그것이 속박이라고 생각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사랑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자기감정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어른이 된다는 건 결국 책임지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단계였다. 비로소 책임이라는 단어에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게 된 나이에 이 사람을 만났고, 인생이란 타이밍이라는 걸 실감했다.



- 혹시 루이제가 결혼하기 싫으면 나랑 연애만 해도 돼.



그는 언제나 자기 소신 앞에 당당했다. 그도 나를 만나기 전 결혼이라는 형태를 딱히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여기가 바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어떻게 나를 만나 갑작스레 결혼을 원하게 된 걸까?



- 너는 나랑 왜 결혼을 하고 싶어?


- 이렇게 잘 맞는데 결혼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아?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은 인생에서 찾기 쉽지 않다는 거 알잖아. 가치관부터 시작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가 너무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너 생각은 어때?



그는 언제나 명쾌한 대답으로 종종 내 말문이 막히게 만들곤 했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가치관을 베이스로 하는 어플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 더욱 당당하게 말할 권리가 있었다. (지난 글 참조)


 




- 나랑 평생을 약속했는데 내 어떤 점들이 맘에 안 들면 어떡해?


- 코어가 맞으면, 다른 부분은 감내하고 사는 거지.



이렇게 대답했을 때 그가 참 현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문현답이었다. 그렇지. 사소한 것들은 감내하고 사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코어가 맞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결혼에 대한 생각 정립은 내 나이 서른 살에 한 사람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러나 가치관은 변하고, 결혼에는 더욱 현실적인 것들(예컨대 돈)이 필요했다. 앞으로 연재할 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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