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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Mar 12. 2020

글을 쓰지 않기엔 나는 너무도 예민한 촉수를 가졌다

오늘의 출퇴근 단상

내가 가장 생각을 많이 하는 시간은 운전하면서 출퇴근할 때다. 혼자 차 안에서 1시간가량 밀폐된 공간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는 큰 방을 둘이 쓰고, 그것도 널찍이 떨어져 있어서 편하고 조용한 편이지만 어쨌든 하루 종일 옆에 사람이 있다. 나는 부모님과 같이 살기 때문에 당연히 집에 가도 늘 가족들이 있다. 아무리 내 방문을 닫고 있어도 매한가지다. 같은 공간에 항상 사람이 있다는 건 피곤한 일이다. 왜 언젠가부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 못하고 중간에 끊기는지 이제 이해가 됐다. 회사 건물에 발을 디디는 순간, 집 문을 여는 순간 스위치를 끄듯이 머릿속 수많은 생각들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글쓰기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분명 일이 없는 시기인데, 뭔가 열심히 타이핑을 하는 소리가 온 방에 울려 퍼지면 부담되기 때문이다. 난 어릴 때부터 손으로 일기 쓰는 일을 좋아했는데 요새는 집에서도 솔직한 일기를 쓰기 어렵다. 누가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일기는 항상 모두가 잠든 밤에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이후로는 일찍 잠들어야 하기 때문에, 밤잠까지 포기하고 일기를 쓰는 건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드는 짓이다. 가족들이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쓰고 있다가 혹여라도 방문이 열려 그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누구에게도, 특히 엄마에게는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 싫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책상 달력 뒷면에 빼곡한 글씨로 당시 좋아하던 애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써왔는데, 하루는 엄마가 몰래 그걸 읽고는 놀라서 "수지야, 엄마에게 말 못 하는 고민이 많니...? 네가 이렇게 많은 고민을 엄마에게 말하지도 않고 가져왔다는 게 엄마는 너무 속상하다." 그건 분명히도 실망의 뉘앙스였다. 나로 인해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싫었다. 그리고 내 고민을 들킨 게 부끄러웠다. 그로부터 15년 넘게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몰래 일기를 쓸 때면 그 날 엄마의 실망한 얼굴이 두둥실 떠오르고, 더더욱 내 감정을 들키지 말도록 철저히 숨겨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내가 왜 가족들에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사는지, 스스로를 내보이는 일에 인색해졌는지와 관련해서는 이와 같은 분명한 경험적 본류가 있었다. 지금의 나를 만든 순간들에 대해서는 photographic memory를 갖고 있지만, 반대로 엄마는 저 장면을 절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나는 사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 즉 프라이버시에 극도로 민감하다.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늘 긴장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요새는 출퇴근 시간 빼고는 혼자 있을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쁘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내가 일본 유학 시절에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겉으론 안 그런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나게 예민한 사람이라 사람들과 있으면 나와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쓴다. 그뿐 아니라 그 날의 날씨와 몸의 온도, 주변 사물의 배치, 옷매무새, 후각적 요소까지도 모든 게 내가 신경 써야 할 범주 내에 있다. 특히 젠더, 계급과 관련해서 내 감수성을 건드리는 일은 견디지 못하고 깊이 담아둔다.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한번 오늘 하루의 테이프를 재생하며 한 장면 한 장면 복기한다. 아, 이 때는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저렇게 행동했어야 하는데, 이건 잘못했고 저건 나름 잘 대처했네, 하면서 감상한다. 외국에 사니까 인종적 문제, 거기에다가 일본이라는 정치적 공간이 주는 민족성ethnicity과 식민성의 문제까지 겹치고, 외국어로 내가 말하는 모든 표현들에 대한 검수라는 한 꺼풀의 차원이 더 존재해서 재생 시간은 두 배 세 배로 늘었다. 인지하다시피 결코 편안한 관람은 아니다. 시청자처럼 그냥 스트리밍만 하는 게 아니라 PD가 되어서 온갖 장면을 다시 편집하고 잘라 붙이고 새 버전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이다. 나는 그렇게 기어코 같은 순간을 두 번 살아내야만 하는 루틴을 갖고 있다.


저 먼 이국에 유학생 신분으로 혼자 있으면서, 언어에 대한 스탠더드가 높은 데다가 모어도 아닌 외국어로는 섬세하게 날 드러낼 수 없으니 속은 죽도록 상하지, 자존심은 극도로 세므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무나 만나는 건 당연히 내가 혐오하는 일이었고, 그러니 내 앞에 얼마나 바다처럼 무한하고 광활한 시간이 펼쳐졌겠는가. 그 시간이 결코 축복이 아니라 얼마나 공포스럽게 공허한 것인지 나는 안다. 혼자 있으면 온갖 생각을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된다. 그중에선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것, 그래서 나를 풍요롭게 성장시키는 것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혼자 가만 놔두니까 내 안에서는 우울의 나무가 나도 모르는 새에 불쑥불쑥 하늘처럼 자라났던 것이다. 게다가 누구에게 이를 털어놓거나 온전히 솔직해지지도 못한다. 누구도 내 언어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조용히 자조할 뿐이다. 내 뾰족한 촉수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뭉툭하기 만들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사람들과 있어도 예민해서 힘들었지만, 혼자 있어도 어김없이 긴장하는 사람이고, 거기에다가 외로우면 예민함이 오히려 극에 달에 점점 미쳐갈 수밖에 없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갑자기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오늘 아침에도 차를 타고 오는 내내 팟캐스트를 들으며 온갖 생각이 미친 듯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 NPR 라디오 팟캐스트에서 샌더스가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좋지 못한 결과를 얻고 있다는 뉴스를 듣다가, 이 사회에서 노동 계급의 설 자리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요즘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내가 '빈곤'이라는 의제에 대한 민감성이 정점에 올랐다는 사실을 생각하다가, 역시 나는 너무 예민한 촉수를 가져서 피곤하다고도 생각하다가, 작가가 되지 않기엔 자기는 너무 많은 표정과 감정을 기억한다는 이슬아 작가의 문장이 떠올랐고, 역시 나는 글로 풀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들이 회사 건물에 들어서는 순간 휘발될까 무서워 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잠깐씩 교통이 정체될 때마다 에버노트에 빠르게 몇 자 적어놓곤 하는데 사실 거의 다시 보지 않는다. 모든 건 내 머릿속에서 정리도 안 된 채 마구 부유하고 있다. 회사에 가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내야지 하고 지금 이렇게 앉아 있다. 아직 본론에는 들어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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