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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제 Sep 22. 2021

자연스러움의 감각

1.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렁인다. 평소 잘 켜지도 않는 오래된 노트북을 펼쳤다. 



2.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 저녁, 아껴두었던 홍칼리님의 <신령님이 보고 계셔>를 읽었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모든 것에 안심이 된다. 운명이란 명을 운전해나가는 뜻이라는 글귀를 읽고 마음이 놓였다. 사주 보는 걸 좋아하는 나는 운명론을 꽤나 믿는 편이었다. 사주풀이의 많은 부분이 내 인생과 들어맞기도 했고, 길을 잃을 때면 다시 사주로 돌아가 미래의 이정표를 찾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팔자라는 것에 역으로 끌려다니고 있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는데, 사주명리 또한 결국엔 해석투쟁이라는 칼리님의 문장이 날 해방시켜주는 기분이어서 너무나 좋았다. 


사주에 역마살이 2개나 껴있는 나는 본래 한 곳에 정주하기보다 여러 곳에 돌아다녀야 할 팔자(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내 팔자를 거스르고 공무원이 되었다. 결이 맞지 않은 직장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고문일 때가 많다. 이 현실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 하고 부대낄 때가 많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얼마 전에 엄마가 내게 해 준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엄마는 가치관이 맞지 않는 회사에서 억눌린 채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해 고민하는 내게 "너는 네 안에서 자유를 찾아."라는 말을 해주었다. 당분간 외부 상황에 흔들리기보다 나는 나만의 준거틀, 사유체계 안에서 맘껏 유영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데에 집중해야 할 것 같다. 회사에서 여러 변화가 많을 향후 몇 개월 동안엔 특히. 



3. 애인의 현명함을 닮아간다. 나는 표현에 있어서 유독 욕심이 많고 초조해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언어적 표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문자언어에는 더더욱. 하루를 마치며 드는 소회, 상대방에 대한 내 감정, 요즘 혹은 오늘 내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생각 등등... 이런 것들을 빠르게 언어화하고 당장이라도 전달하고 싶어 안달 난 인간이었다. 어느 정도 유전적 영향이 있기도 했고, 후천적으로 길러진 면도 있었다. (우리 엄마는 장문의 카톡으로 가족 간 분쟁을 해결하려 하거나 자기감정표현을 폭포수처럼 글로 쏟아내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나와 애인의 표현 스타일이 달랐다는 것이다. 애인은 대면 상황에서 사랑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반면, 비대면 상황(전화, 특히 카톡)에서는 건조하거나 내가 보낸 표현에도 시큰둥하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특히 연애 초반에 매일매일 상대에 대한 고마움이나 사랑스러움과 같은 감정표현을 빼곡하고 촘촘하게 보내고 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 달리, 그는 내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써놓은 애정표현에도 무덤덤하게 반응하거나 심지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어서 종종 오해가 발생하곤 했다. 


애인과는 몇 번의 폭풍 같은 대화를 통한 조정기간을 거쳤다. 애인은 언어적 표현 면에서 노력하기로 했고, 나는 애인의 비언어적 소통방식을 이해하고 참을성을 갖기로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추석을 앞두고 가족 구성원과 사소한 감정 다툼이 큰 일로 번지는 일이 있었는데, 상호 간 오해를 키우는 데에 카톡이 큰 몫을 했다. 애인에게 이 문제로 상담을 했더니, "카톡과 같은 플랫폼에서는 비언어적인 요소가 담기지 않으니까 이런 건 역시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다"라고 했고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건,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애인이나 친구랑 카톡 할 때, 언어와 공백 등에 크게 집착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는 말에 토씨 하나까지 신경 쓰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편집자가 최종 탈고 전 문장을 다듬듯 카톡 하나를 쓰는 데에도 온 심혈을 기울이던 나날들. 상대가 내가 보낸 카톡을 읽는 타이밍, 답장이 오는 데 걸리는 시간까지 자로 재듯 계산하고 그걸로 상대의 마음을 저울질하던 때도 자주 있었다. 이성뿐 아니라 누구든 내가 마음 쓰는 이에 관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그런 일로 괜한 힘 빼기를 하지 않는다. 상대가 답이 늦는다면 그만한 사정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내 카톡에 비해 성의가 덜 느껴진다면 그건 상대가 이런 일에 원체 서투른 탓이다. 반대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에게 카톡을 보낼 때에도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마음을 빽빽하게 담지는 않는다. 한 마디로 나의 마음 접시에 빈 공간이 있다면 억지로 그러모아 채우기보다 그냥 그대로 둔다. 대신 상대와 직접 만나는 상황에서 더욱 집중하려 한다. 언어에 대한 욕심을 비웠다고 해야 할까. 모든 것을 문자화하려는 욕구에 지배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든다. 


이는 예민한 감각이 무뎌져 가는 느낌이라기보다는, 담을 것은 담고 흘릴 것은 흘려보내려는 자연스러움의 감각을 익히는 것에 가깝다. 나는 하루가 다르게 자연스러워지고 있고, 내 생이 점차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현명한 애인 덕이다. 그와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연애 초기와는 또 다른 모양과 질감을 가진 애정이 샘솟아난다. 흙의 기운을 가진, 대지처럼 넉적하고 무엇이든 키워낼 수 있는, 날마다 나를 싱그럽게 자라나게 하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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