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엄마 이름은 한국 이름이 아니라 일본 이름인가
엄마의 기일에 추모공원을 찾았다. 유골함 앞에 서자, 2017년에 시간이 멈춘 엄마의 환한 미소가 나를 반겼다.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엄마 이름 네 글자가 궁금해졌다. 왜 엄마 이름은 한국 이름이 아니라 일본 이름일까?
그 질문이 왜 하필 그날 떠올랐을까. 아마도 세월이 흘러 상실의 아픔이 조금씩 무뎌지자, 이제야 차분히 돌아볼 여유가 생긴 까닭일 것이다. 늘 곁에 있었던 이름이 그날따라 낯설게 느껴진 건, 그것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엄마의 삶과 역사를 품은 상징처럼 다가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나이가 들며 뿌리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물음은 자연스레 내 안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엄마는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일본에 머물며 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엄마를 낳았다. 매화를 뜻하는 ‘우메(梅)’가 들어간 이름, 우메자. 혹독한 시대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을까. 돌아가신 분들에게 물을 수 없으니, 나는 그저 내 좋을 대로 해석할 뿐이다.
광복 후, 외할아버지는 일본인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을 데리고 고향 순천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의 귀환이었지만, 그 여정은 새로운 시작이 되지 못했다. 외할아버지는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이름 모를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는 시댁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편만을 의지한 채 고국을 떠나온 외할머니는 분명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쳤을 것이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자신이 낳은 딸을 키워야 한다는 모성애로 모든 걸 버리고 타국 땅으로 건너오셨으리라.
쫓겨난 외할머니의 소식을, 엄마는 평생 들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인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조각조각 끼워 맞추며, ‘아, 엄마에게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정도로 짐작했을 뿐이다.
이제 나도 중년에 접어드니, 문득 외할머니가 떠오를 때가 있다. 낯선 타국에서 남편과 딸을 잃고, 홀로 기구한 생을 살아냈을 그분의 삶이 이제는 안쓰러움과 연민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힘든 격동의 시절, 그 외로움 속에서 외할머니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을까. 나는 감히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
25년 전쯤, 내가 진도라는 외딴섬에 발령받아 관사에서 엄마와 함께 살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낯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지금 장례식장에 있으며 장례비용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담당 직원은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외할머니에게 아들이 하나 있지만 호적에 올라 있지 않아 수소문 끝에 엄마의 호적을 통해 연락이 닿았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엄마와 나는 서로 “헐…” 하며 각자의 상념에 빠졌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엄마 장례식 비용을 환갑이 넘은 딸이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겁이 난 우리는 장례비용을 이체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한 번 찾아가 볼 걸 하는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그 당시 나도 어렸고, 엄마도 선뜻 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평생 고아 아닌 고아로 살아온 엄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외할머니가 그리웠을까, 미웠을까.
그 이후 엄마는 외할머니에 대해 단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이 없었고, 나 역시 서서히 잊어갔다. 하지만 그때의 일화는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엄마 이름이 왜 일본 이름인지 어렴풋이 외할머니라는 존재와 연결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 나도 어쩌면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일반인들 중 기구한 운명을 지닌 조부모님들이 계셨구나 하는 생각에 내 정체성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일본인이었다니, 낯설기도 하면서 마음 한구석엔 나도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때가 그 시기였을 것이고 쓸데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고민 아닌 고민에 빠진 적이 종종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사책을 읽거나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소설 속 인물을 만날 때마다 내 뿌리를 생각하는 습관이 생겼다. 솔직히 말하면, 외할머니가 일본 사람이 아니었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내 안의 피 한 줄기가 ‘타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말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쓸데없는 이상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내 아이들은 가끔 “우리 이빨이 이렇게 된 건 엄마 쪽 유전이 강해서 그런 거 아냐?” 하고 웃으며 외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엄마도 앞니가 부정교합이었고, 세 아이 모두 같은 위치에서 닮아 있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엄마의 이빨이 그제야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편으론 고등학교 시절 문학시간에 읽었던 김동인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가 생각나면서 나는 일본인 외할머니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우리 아이들의 유머를 통해 상쇄되는 느낌을 받았다.
왜 엄마의 이름은 한국 이름이 아니라 일본 이름일까. 그 의문을 따라가며 떠올린 흐릿한 기억들은, 결국 이름이 무엇이든 큰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 시절의 삶은 이름보다 훨씬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환경 속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문득, 그 질문이 어리석게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처연한 삶을 끝내 견뎌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내 아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가 아닐는지.
그 당시 국적을 떠나 운명에 이끌려 생의 한가운데에 놓였지만 꿋꿋하게 자생하는 야생화처럼 삶을 살아내신 분들이 어디 외할머니와 엄마뿐이겠는가. 운명을 믿는 건 아니지만, 외할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엄마가 지불한 건 어쩌면 기나긴 시간을 돌아 다시 연결된 두 생의 마지막 인사였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내색은 하지 않으셨겠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엄마가 존재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을 얻으셨지 않았을까. 내가 엄마가 계신 추모공원에 올 때마다 엄마를 기억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