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자를 확인했다

죄송합니다

by 나비

“선생님... 미온이 엄마입니다. 미온이가 새벽부터 복통이 심해서 오늘 하루 결석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수고하세요.”


아침에 문자를 확인했다.

아이가 아파서 결석하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닌데, 왜 끝맺음이 ‘죄송합니다’일까.

그 짧은 단어 하나에 오래 마음이 머문다.


그 ‘죄송합니다’ 속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었을까.

아이를 잘 챙기지 못했다는,

아이가 아픈데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미안함,

엄마로서 늘 더 잘해야 한다는 무언의 책임감 같은 것들일까?


부디 그 죄송함이 결석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부담감 때문이 아니기를.

수업을 빠져서, 개근을 놓쳐서,

‘학교에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가 아니 길,

그 말의 온도가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는 엄마의 체온이기를 바랄 뿐이다.


어릴 적 나는 학교에서 아프면 안 되는 아이였다.

아파서 조퇴하면, 한 시간이나 되는 먼 거리를 배를 움켜쥐고 걸어 집에 가야 했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면 엄마는 나를 걱정하기보다 화를 냈다. 마치 내가 아픈 게 죄라도 되는 듯, “아픈 것 같지 않은데, 그냥 다시 가서 공부해.”라는 말로 나를 다시 돌려보내곤 했다.


다시 학교로 향하는 길은 서러웠다.

어린 마음에, 그래도 엄마가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괜찮냐”는 한마디를 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라도 엄마에게 내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서 꾀병을 부렸던 걸까.


잘 모르겠다.

그 시절의 나는 그런 계산을 할 만큼 영리하지도 않았고, 그저 배가 아파서, 혹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생겨 마음이 아파서 집이라는 곳을 찾고 싶었을 뿐이었겠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엄마의 삶은 얼마나 치열했을까 싶다. 1970년대, 모두가 힘겹게 하루를 버티던 시절. 결혼도 하지 않은 스물일곱 살의 여자가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세상의 눈과 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딸이 아파도 품어줄 여유가 없었고, 당장 생계를 위해 일터로 향해야 했다. 그래서 아픈 아이는, 사랑보다 책임으로 더 무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어찌할 수 없는 그 현실에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저 엄마의 화가 내 탓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다음부터는 아파도, 힘들어도 “괜찮다”라고 스스로 달래는 버릇이 생겼다. 그 버릇은 자라서 어른이 된 지금도 남아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어 보니, 비로소 그때의 엄마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아이의 열이 오를 때마다 나는 무기력했고, 그 무력함은 자꾸 화로 번졌다. 출근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낫지 않으면 ‘왜 하필 지금 아프니’라는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곤 했다. 그때의 나는 바로 내 어린 시절의 엄마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명치끝이 아려왔다. 어린 시절, 엄마를 원망하던 내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그 답답함과 속 타는 무력함 속에서 엄마는 수없이 절망했었다는 것을. 나는 그 절망을 그제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아이가 아파서 결석해 죄송합니다.”


그래서일까.

오늘 내가 받은 이 문자 메시지는 단지 결석을 알리는 것을 떠나 아이가 아파 마음이 아픈 한 엄마의 고백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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