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의 학급살이4

교실에서 발견한 작은 기적들

오늘 쉬는 시간에 한 아이가 서럽게 울었다. 그 아이가 너무나 슬프게 울어서 반 아이들도 하나둘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 있던 한 여학생이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내 쪽으로 데려왔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안아 든 모습이었다. 그 장면이 어찌나 따뜻하던지, 울고 있는 아이를 앞에 두고도 나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상황은 이랬다. 보드게임을 하다 상대편 아이가 거짓말을 하자, 그 말을 듣고 속상한 마음에 화를 내며 몸을 돌리다 그만 그 아이의 정수리에 입을 부딪친 것이다. 오히려 울어야 할 아이는 울지 않았고 (심하게 부딪힌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부딪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함께 게임을 하던 아이들은 얼굴이 벌개진 채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고 이빨이 깨졌을지도 모른다며 깨진 이를 찾아야 한다고 웅성거렸다. 하지만 아이의 입을 살펴보니 다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울음을 멈추지 못한 아이가 안쓰러워 일단 여학생과 함께 보건실로 보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진정된 아이와 여학생이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토끼눈이 된 아이를 본 상대편 아이가 안쓰런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응, 이제 괜찮아. 너도 괜찮아?” 상대편 아이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그 아이를 다독였다. 그런 후 서로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두 아이는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함을 되찾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모두 간 후, 나는 울던 아이 어머니께 전화로 오전에 있었던 상황을 전했다. 그러자 며칠 전, 그 아이가 동생과 부딪혀 이가 깨진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치과에 가서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그 기억이 떠올라 놀랐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제야 나는 왜 그토록 아이가 공포에 사로잡혀 울었는지 이해했다. 다행스럽게 아이는 급식도 잘 먹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자기를 보건실로 데려다준 친구와 놀 약속을 하며 웃던 모습이 떠올라 걱정을 덜었다.


상처는 빨리 잊게 하는 것이 최선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될 때에는 그 아픔을 함께 다독여 주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오늘 아이 옆에서 괜찮은지 위로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날의 나쁜 기억이 조금 옅어졌기를 바란다.


교실이라는 작은 우주는 아이들이라는 별들이 모여 작은 기적을 만들어내는 곳이다. 그 기적이란, 어제 꾸중 들었던 아이가 오늘은 친구의 아픔을 공감하며 조용히 위로를 건네는 순간이고, 보드게임을 하다 욕심에 친구를 때린 일을 스스로 후회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순간이며, 아파서 보건실에 다녀온 친구에게 괜찮은지 먼저 물어보는 마음들이다. 수업 중 자가 없어 연필로 선을 긋는 친구에게 아무 말 없이 자를 건네는 손길이고, 입안을 다쳐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급식 시간에는 매운 김치를 받지 말라고 살뜰히 알려주는 다정함이다.


한자 ‘교육(敎育)’과 영어 ‘education’은 각각 ‘가르치다’와 ‘끌어내다’에서 출발한다. 방향은 다르지만, 결국 지향하는 바는 같다. 사람의 성장을 돕는 일. 우리는 흔히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아이의 미래를 예측한다기보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신이 아니다. 어떻게 한 아이의 앞날을 미리 단정할 수 있겠는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이를 바꾸기보다 우리의 시선을 먼저 바꾼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아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판단하는 순간,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가능성은 놓쳐버리기 쉽다.


어제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오늘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는 않는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결국 그 아이가 겪은 경험이다. 풍부한 경험 속에서 작은 성취가 쌓이고, 그 조각들이 모여 아이를 성장시킨다.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싶다면 우리는 그 믿음을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한다.


“저 아이는 안 될 거야.”
“저 아이는 늘 저러지.”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럴 거야.”

우리는 때때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낸다.


하지만 이 말들은 아이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 흔들린 우리의 믿음을 붙잡으려는 강 반어적인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시선이다. 교육은 ‘될 아이’를 가려내는 일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돕는 일이다.


어쩌면 교육은 아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꾸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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