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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잰 Oct 10. 2023

[루잰 수필] 또다시 가을이다.

  이맘때쯤이면 늘상 '벌써 10월이 왔다'며 이제 곧 겨울이고, 올해도 끝자락이구나라는 말을 하곤 한다.

  올해 역시 그렇다. 연초에 새롭게 각오를 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긴소매옷을 꺼내 입으며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절기는 이렇게 무심하게 돌고 또 돌아오는데 사람만은 무심함 속에서의 영점 회복이 참 어렵다. 좋았다가 힘들었다가를 반복하며 매일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고 다시 일어서보려 하지만 또다시 주저 않고 나이와 세월을 느끼며 살아간다.


  작년 4월 서울의 한 지방자치단체 협치 조정관직을 퇴직하고 그해말까지는 쉼을 가지며 재충전도 하고 여행도 제법 다녔었다. 연말쯤 되어 원하는 일의 분야에서 공고가 있어 반색을 하며 서류접수를 했고 서류 합격을 거쳐 필기와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필기도 좋았다. 그런데 면접에서 내가 이해하고 있었던 직무의 내용과 다른 면접 질문들이 이어졌고 5:1 면접은 내가 혼나는 듯한 분위기의 압박 면접으로 진행되었었다. 면접을 끝내고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무례한 면접관들은 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라며 분개했었던 적이 있다. 나중에 들어 보니 공고문에 낼 수 없는 내부적으로 암묵적인 룰이 있었던 듯하다고 한다. 30대의 젊은 의원 보좌관 출신들 위주로 채용했다고 한다. 그때 처음으로 내 나이를 느꼈다. '아... 나도 이제는 채용시장에서는 뒷방 늙은이가 되었구나.' 인정하기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부인할 수도 없는 이 사실에 나는 참 힘들었었다.


  비영리 사단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처음 시작할 때 큰 포부가 있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늘 어렵게 단체를 꾸려가는 현실을 꼭 깨보이겠다는 것이었다.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운영과 회원모집에 있어 월등하게 잘 해낼 자신이 있었었다. 법인 설립 후 기획재정부단체 등록까지 참 많은 일들을 열정적으로 해왔다. 그때의 다이어리와 컴퓨터 폴더를 열어보면 어떻게 그 일들을 다 해왔나 싶을 정도이다. 그렇게 조직을 만들어 놓고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겠지라는 마음에 지방자치단체의 협치를 지원하고 조정하는 일로 잠시 외유 아닌 외유를 하다가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현장은 쉽지 않았다. 가장 컸던 데미지는 아무래도 코로나였었다. 그 시기를 거치며 회원도 줄어들고 사업도 축소되었다. 하드웨어는 남아 있지만 그 속을 채우는 소프트웨어가 계속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비유가 적절할 것 같다. 게다가 생업이었던 체육시설도 코로나로 인해 거의 문을 닫은 상태로 뭔가를 다시 만들어내기에 너무 힘든 상황. 안 좋은 상황들이 동시에 닥쳐왔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실현 현장에서의 어려움과 내 나이를 실감하고 나니 갑자기 번아웃이 왔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과 슬픔, 무력감이 몰려왔다. 번아웃을 극복하기 위해 생활체육지도사 자격도 취득하고 제주올레 전코스 완주 도전을 시작하며 그렇게 몸부림치는 일 년을 보내고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가을은 늘 뭔가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여전히 마음의 힘듦은 남아있지만 나의 뒤에는 주변의 사람들이 그만큼 다가왔다. 저녁에 술 한잔 하자며 불러내서 힘내라며 혼도 내가며 응원하는 동생, 맛있는 것 먹고 바람 쐬러 다니자며 나를 데리고 콧바람 쐬어주는 대표님들, 내년 사업에 아이디어 어떻냐며 2시간씩 전화통화로 내게 힘을 주는 대표님, 법인 후원금액을 소액이나마 더 올려 주시며 응원하는 대표님들과 지인들, 그리고 묵묵히 늘 자기 자리에 있는 세 딸들과 남편. 주위의 사람들 덕분에 번아웃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생겼었다. 이 가을에 충분히 사색하며 나의 나이를 인정하고 또 주변을 인정하고 바라보며 다시금 나를 다잡는 시간으로 만들어가고자 한다.


  생일이 겨울이라 2살이 어려진 2023년이다. 만 나이가 공식나이로 바뀐 것뿐이라 새로 생긴 2년이 실감 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귀하게 잘 써야지라는 생각이 지금 문득 들었다.


  [커버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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