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배가 고프다. 서정적으로 말해보면 '너를 떠난 너를 보낸 마음의 허기가 어쩌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그냥 당 떨어지는 시간이 아이 학원가는 시간이다. 말 그대로 간식시간이라 배가 고프다.
일부러 점심을 늦게 먹어보기도 하는데 2시까지 버티다 먹으면 오전이 너무 배가 고프고 1시쯤 먹으면 어중간하게 간식이 당긴다. 아니면 아이와 만나서 학원을 보낸 것만으로도 기운이 빠져서 일까? 어쨌든 그 간식 시간을 채울 무엇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다. 하루는 마카롱, 하루는 커피 한 잔, 하루는 조각 케이크, 하루는 토스트 등등... -적다 보니 요즘 내가 살이 찌는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잡았다, 요놈!- 결국 살이 찌고 고지혈증으로 고생하는 것도 나이고 먹는 것도 나이고 기승전결이 모두 나의 일이었다.
간식은 거들뿐.
하지만 배고픔을 참는 건 너무 힘이 든다. 꼰대 성 발언으로 시작하자면 작년만 해도 배고픔 참기 달인이었다. 늙으니 인내심도 같이 사라져 가나 보다. 젊음과 같이 사라지는 인내심이라면 이대로 혹여 노인이 되었을 때는 정말 걱정이다. 밥 시키고 10초 만에 밥이 안 나오면 성질을 부릴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금부터 먹부림을 조금 내려놓고 인내심을 길러야 한다.
생각해보니 예전에 아르바이트하던 곳에 70대 어르신이 계셨는데 딱 한 번, 밥 먹고 평소보다 5분 늦었는데 역정을 내셔서 굉장히 당황한 기억이 난다. 아직 30대인 나도 이러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의 부족한 이해심에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때는 ‘5분 가지고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냐’고 감히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는 20대보다 더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인간이 되었고 그런 입장이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어르신의 분노란 참으로 당연한 처사였다는 것을.”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은 고통은 나눌 수 없고 어느 누구도 같은 모양의 비교되는 고통을 가지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고통, 즉 나의 고통은 어느 정도인지 다른 사람이랑 비교하고 내가 고통스러워도 되는 일인지 생각하는 일에 골몰하고는 했다. 그리고 왜 타인의 고통을 모를까? 왜 아프다는 걸, 힘들다는 걸 모를까? 공감 능력 결여의 세상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느끼는 건 공감능력이 생기려면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책에서 노인이 “아파 본 사람이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아는 거다.”라는 이야길 한다. 그리고 내가 읽었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도 결론적으로 고통은 분담하거나 오롯이 이해받을 수 없으므로 공감과 연대보다 스스로 극복하는 법을 배워가자 라는 결론을 맺는다. -그 책에서 고통을 분담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의 일말을 기대를 했는데 아주 와장창 깨졌다.-
나는 일정 부분의 고통은 나누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인간이 어우러져 살아간다고 믿었는데 실제는 다들 독고다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진실이고 명제였다. 배고픔조차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물론 배가 고파본 사람은 비슷하거나 근접한 고통까지 떠올려서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역치는 다르고 똑같은 고통을 받아도 느끼는 바도 다르다.
결론 : 같은 고통 같은 건 없다.
그렇다고 ‘나 배고파’라고 말을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입을 닫으면 더욱더 모르게 될 뿐이다.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배고픔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배고프다고 말을 해야 상대가 조금이나마 배고프다고 알아듣는다. 하지만 이렇게 알아듣게 하는 데에도 다채롭고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언어의 배신이 이어진다. 결코 내 마음을 완벽하게 말과 글로 전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모호하다. 그러므로 자꾸 이리저리 비교 체험하고 여러 가지 다른 설명법을 익혀야 한다. 말을 요리조리해도 이해할까 말까 하는 일들을 ‘나도 배고픈데.’하고 생각만 하면 뭐하냐는 말이다.
신랑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될지 안 될지는 일단 물어야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 이것을 집사부 일체에 나온 박나래가 다시 말해서 신랑의 깊이에 오올~ 했던 적-신랑의 말보다 박나래의 말에 더 공감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이 있다. 그러니까 이건 간단한 확률의 문제이다. 내가 행동하지 않으면 무조건 0%의 일을 기록하지만 일단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만으로 50%의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거기서 완성이 되면 100% 안되면 0%. 나는 그런데 50%까지 기대감을 올리는 자체를 조금 두려워했다. 실망을 50%나 하는 것과 아예 기대조차 0%인 상황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며 지레 겁먹고 숨는 것이다. 근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해보기나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배고픔도 마찬가지로 표현하면 떡이 굴러올 확률 50% 상승! 이 얼마나 똑똑한 세상살이 법이란 말인가. 나는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얘기를 배고파서 하고 있다. 무조건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거다. 해서 실패하면? 그럼 그 일이 나랑 안 맞나 보다, 털고 나오면 된다. 후회를 버릴 수 있고 헛된 희망을 버릴 수 있어서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그러므로 뭔가 선택의 기로가 있다면 말과 행동을 한 번은 해보는 것으로 인생을 설계하자고... 열 받고 억울하면 말을 하나도 못하는 사람이 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내가 하는 말이니까 더 와 닿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많이 참고 분해하며 살다가 최근 들어 일단 눈 꼭 감고 말을 지르고 볼 때가 생겼는데 다른 건 몰라도 속은 시원했다. 말 안 하고 두고두고 곱씹을 일이 이제는 그 후련한 기억만 남았다. ‘아,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꾸 표현하고 내 말을 많이 하며 사는구나.’ 싶었다. 물론 입이 방정일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입 꾹 닫고 벙어리처럼 살면 그 독이 마음에 쌓여서 나에게 독이 된다. 나에게 독이 되지 않도록 꺼내면서 상대에게 독이 되지 않도록 말을 꾸미는 것이 조리 있는 말하기가 아닐까 하고 말 많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는 생각한다.
우리 아이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소리를 멈출 수 없는 아이이다. 말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면서 끝없이 소리를 채운다. 예능으로 치면 오디오 비는 일은 잘 때 말고는 없다. 심지어 자는 것도 굴러다녀서 존재감 뿜뿜 하는 아이이다. 소음공해로 비유하면 아이에게 너무 하니까 예능으로 예를 들었지만 딸과 24시간 붙어 있으면 머리가 웅웅 울린다. -아이가 조잘거리는 게 귀엽다는 분들은 그 아이의 조잘을 저와 나누어 주세요. 제발. 아니, 애가 안 예쁘다는 거랑 다르다구요. 귀가 좀 쉬고 싶어요.-
대신 자신에게는 이게 좋은 모양이다. 해달라는 걸 맘껏 입으로 뿌려놓고 미끼를 물면 건지면 되는 일이다. 아이는 벌써 나보다 먼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약았다. 나는 곰탱이 엄마인데 아이는 여우 아이다. 휴우... 그래도 내 딸이니 뭐라 할 수도 없지만 가끔은 이 말 많음으로 인해 화가 많이 나는 걸 꾹 참는다.
이런 어린이와 살고 있어서인지 에너지가 자주 고갈되어서 충전을 요구하는데 보통 당과 카페인이다. 아이를 일찍 유치원에서 하원 시키고 피아노 데리고 가는 날 유독 간식을 찾는 것도 어쩌면 이런 심리적 압박감 때문일지 모른다. 계속해서 귀를 열어야 하기에 에너지를 채우기 위한 나의 방편. 그런데 그 마저 현재 위기가 왔다. 고지혈증 판정이 나와서 당을 줄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다. 게다가 인터넷을 찾으니 카페인도 좋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당과 카페인이 없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런 불상사가!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 운동까지 해야 하는, 우리는 다 알지만 지켜지지 않는 건강법이 다 나왔다.
“술, 담배, 커피 끊고 운동하세요.”
술, 담배는 원래 안 하는데 운동과 카페인... 게다가 당. 나는 당 부족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이틀 만에 깨달았다. 사람이 당을 끊은 것도 아니고 줄인 것만으로도 우울해진다. 당이 나에게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줘서 참 고마웠다. 하지만 ‘이제 안녕.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 당분간만 안녕. 나중에 보자.’ 인사를 한다. 물론 아직도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질척거리고 있어서 당이 나를 쉬이 떠나지는 못하고 있다. 타인이 고통을 나눠주지는 못해도 당은 나를 위로해줬는데 이대로 가야 한다니 나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사랑한다, 당분아. 그리고 정말 안녕.’
앞으로는 이 당과 카페인 때문에 조금 쳐지거나 괜히 아픈 것 같은 내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건강하게 살려면 끊어야지. 아이도 피아노 가기 싫은 날이 있을 것이다. 끊고 싶은데 못 끊는 날. 그래도 엄마가 데려다준다고 열심히 딩동 거리고 있을 텐데 나도 열심히 이별을 해야겠다. 앞으로 이 시간에 간식은 먹지 말자. 지금도 물론 빵 하나와 커피를 놓고 마시고 있는데 어제보다는 양을 줄였으니 끊는 날도 오겠지. 일단 도레미부터 천천히 배우는 것처럼 나는 먹다가 한입씩 덜 먹어보는 방법을 채용하겠다.
따라서 저는 당, 카페인 부족으로 당분간은 배고플 예정입니다. 예민하니 건들지 마세요. 이제 말도 제법 하는 사람입니다.
건들지 마시오. 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