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뭘 할까?

by 루카

딸이 물은 적이 있다. 그것은 이 골든타임을 보내기 전의 일이다.

“엄마는 나 피아노 칠 때 뭐해?”

이 물음이 나의 골든타임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그러게, 엄마는 뭘 할까?"

유치원 다니면서도 묻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황했다. 사실 당황할 이유는 없었는데 뭔가 머리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당황함은 아마도 있어 보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 같다. 나는 놀고 있지 않다는 항변을 하고 싶었고 실제로 놀고 있지도 않았다. 결국 당황 끝에 꺼낸 말이라고는,

“일하지. 책 보고 글 쓰고 커피 마시고.”뿐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말이 논다는 말을 풀어서 하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홧홧했다. 일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내가 하는 행위들을 논다고 정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 묘한 기분도 잠시 아이는 그 주제에 금방 관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이제는 다른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지? 사람 무안하게.’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이들이 솔직함으로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건 익숙한 일이다. 그 해맑음이 오히려 속까지 유추할 필요도 없고 좋다. 속마음이 다른 것까지 생각해서 마음을 읽어내려면 생각을 너무 다각도로 해야 하다. 그래서 나는 당황스러워도 그렇게 묻는 아이들이 좋다. 대답을 못할 때는 좀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지거나 혹은 그런 질문을 해보지도 않을 만큼 무언가에 익숙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예를 들면, “저 아저씨는 왜 몸에 안 좋은 담배를 피운담?”이라고 지척에 두고 말하면 나는 피하기에 급급하던 얼굴이 당황으로 바뀐다. 길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싫기는 해도 그냥 피해 가고 싶었던 난 상대의 눈치를 힐끗, 상대도 내 눈치를 힐끗. “얼른 가자.”라는 상황이 된다. 나는 피하기 급급한 어른이 된 것이다.

물론 아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눈치가 조금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로는 나는 그런 바른 소리는 못하는 인간인데 아이의 솔직함에 놀라고 만다. 역시 무식하면 용감.... 아니, 이건 비유가 좀 그렇다. 실은 나도 싫었으면서 아이라서 살짝 용서될 것이라는 생각 뒤로 숨는 비겁한 어른이다. 상대도 아이가 뭘 모르니까 한 말이겠거니 하는 그 생각 뒤로 숨는 것이다. 여하튼 이런 당황스러운 말을 골라내지 않고 뱉을 수 있는 건이 아이의 해맑음이다.

이렇게 당황하게 되는 말 중 오늘의 말은 “엄마는 뭐해?”였다. 글쎄. 너를 보내고 엄마는 뭘 하는 걸까? 너를 기다린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에 넋 놓은 사람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공부하는 아이에게 좀 미안해진다. 너는 공부하는데 엄마 쉬는 거 같아서... 골든타임을 버린다는 생각에 아깝기도 하다. 물론 그동안의 내가 뭘 안 한 것도 아닌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이런 감정들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이런 것을 일단은 ‘열심병’이라고 잠시 명명해본다. 한국인들은 도무지 쉬는 법을 모르는 거 같다. 주위를 쓱 둘러봐도 이 ‘열심병’에 걸린 사람이 한 트럭이다. 집에서든 아이를 기다리든 쉴 수도 있는 건데.

나는 늘 ‘가만히 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는 말을 들어왔다. 특정의 사람도 아닌 불특정 다수에게. 때로는 가만히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고들 하는데 주변에서는 내가 가만히 있는 걸 잘 못 보는 거 같다. 다른 시간에는 쉰다고 생각하고 오해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만히 있는 것을 간과한 사람들의 시선에 ‘열심병’이 걸린 나는 아이를 보내고 글을 쓰는 바쁜 엄마가 된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만들었다기보다는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느낌이다. 그래서 싫어진다. 잠시 생각을 달리한다. 생각의 틀을 바꿔보고 싶다.

일단 내가 뭔가 안 하고 논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고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이것만 해도 하나의 일이다. 엄마 말고 블로거라는 직업을 하나 더 갖고 있는 셈이다. 그래, 이미 열심히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방금 붙인 ‘열심병’이라는 말이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병이라고 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니 말이다. 그럼 뭐라고 하지? 일? 그런데 일이라는 것의 어감도 좀 좋지는 않다. 어쩐지 일이 즐거우면 안 될 것 같다. 이런 것은 또 누가 심어준 생각일까? 나의 생각은 ‘일은 즐겁게 하자.’인데 무심코 일이라고 하면서 힘들다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도대체 누가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하다. 일이 즐거울 수 있는데 왜 즐거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일단 즐거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딸의 물음에 다시 답해보기로 한다.

“엄마는 네가 피아노를 배우는 시간에 글을 쓴다. 이게 엄마의 일이고 즐겁다. 그래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매시간 아까워하며 보내고 있단다.”

일이라는 걸 딸도 즐겁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일해야 돼. 공부해야 돼.’가 ‘게임’과 같은 단어이면 좋겠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먼저 보여 주어야 한다. 공부와 일의 즐거움을.

다행하게도 나는 가사는 힘들어해도 공부나 과제는 힘들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사까지는 아직 포함되지 않은 나의 영역이다. 이 마저도 즐거운 일로 만들기 위해 요즘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고 있다. 일이 즐거울 수도 재밌어서 못 견딜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가치를 가졌으면 좋겠으니 나부터 부정적인 이미지를 버리자.

일단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을 자투리 시간으로 잡지 않고 골든타임으로 잡은 건 잘한 일이다. 그리고 이 시간에 내가 일을 한다. 주로 블로그에 올릴 글을 정리하거나 생각을 정리하며 적는다. 그것이 일이다. 기다려지는 나의 시간, 보석 같은 일하는 시간이다. 생각을 바꾸니 한 결 수월하다. 일단 나는 내가 하는 일들의 가치를 낮춰서 ‘논다’는 틀에 가두었던 걸 ‘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이 ‘일’이라는 것에 붙은 힘들고 지겨운 이미지를 ‘놀이’와 같은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짜란~ 이 얼마나 발전적이며 훌륭한 생각의 변화인가.

다른 엄마들도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긍정적인 이름을 붙여보는 것은 어떨까? 쉬더라도 그것은 재충전의 시간이며 모여서 신나게 떠는 수다는 그저 수다가 아니라 정보교류이다. 우리는 하루하루 살기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글 쓰는 일을 하며 맛있는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 있다. 이러다가 토마토 주스와 정이 들어서 다른 건 안 하고 마시는 일에 집중을 할 수도 있지만 그럼 그건 그대로 맛있는 요리를 음미하는 시간으로 이름 붙이면 된다. 뭐든 네이밍이 중요하다. 그러니 아이들 이름을 받아오면서 30만 원 이상의 돈을 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조상들은 이미 이름 붙이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안 좋은 생각이 깃들면 가진 의미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특히 생각의 꼬리 물기를 잘하는 나는 부정적인 쪽으로 발을 들였어도 끄집어내야 한다. 비판적인 사고도 필요하지만 그곳에서만 있는 건 위험한 일이니 말이다.

딸이 물어보지 않았다면 우왕좌왕 어리둥절 얼레벌레 할 시간을 인지하게 되니 이름이 생기고 할 일이 생기고 해나가게 된다. 확실히 내가 가르쳐 주는 것보다 배울 것이 더 많다. 모든 사람이 스승이지만 특히 자녀는 오랜 시간 함께 하면서 나를 가르치는 존재이다. 몰랐던 수많은 세계에 눈을 뜬 것도 그 때문이니까.

문제는 이 일이 아직 습관이 된 건 아니어서 준비물을 자꾸 빠트린다. 오늘도 노트는 잘 챙겨놓고 볼펜을 안 가져와서 필기구를 하나 더 장만했다. 기왕 사는 거 그동안 사보지 않은 스타일을 고른다. 가격이 비싸면 얼른 내려놓고 저가고품의 상품을 찾아서 마음을 적는다. 그리고 집에 가면 문장 정리도 하면서 암호해독에 들어간다. -글씨체가 가끔은 나도 알아보기 힘들다- 남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이 되기까지 몇 가지 작업을 거치고 포스팅한다. 그게 이 시간의 의미이고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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