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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20. 2019

1,000억원 번 슈퍼개미, 1조 갑부가 된 비결

돈은 이렇게 버는거야

24살. 두 형제의 대학 등록금을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모님이 둘째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군대를 다녀오는 게 어떻겠니?, 아들은 군말 없이 현역으로 입영했다.


대학원을 다니다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고 싶었던 둘째 아들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될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제대했다. 군 생활을 하는 사이에 형이 사법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등록금보다 적은 생활비로 집안의 부담을 덜고 있었다. 그래서 대학원 입학에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가 20년 넘게 운영하던 중국집에 두 아들을 불렀다. 어머니는 연신 두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두 아들도 참고 참던 눈물을 억수같이 쏟아냈다. 이윽고 눈물이 두 사람에게 설움의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중국집은 보증금 한 푼 못 받고 장사하던 그대로 둔 채, 주인만 바뀌었다. 둘째는 마지막 대학 학기를 휴학하고 소위 막노동 시장에 출근했다. 젊은 사람은 기술이 없어 큰돈을 어림없었지만, 잡부일부터 몸 쓰는 일에는 잘 데려갔다.


대학원이나 교수가 될 때까지 먹고 살 돈도 없다. 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가셨고 그날 두 아들에게 각 200만 원씩 쥐어줬다.


더 줄 돈이 없다. 미안하다. 아들아.



취직해서 무슨 답이 생길까? 200만 원으론 남은 학기도 보내기 어렵다. 취직을 졸업해서 어떻게 한다 쳐도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혼은 부질없는 욕심이지. 귀한 딸, 사랑하는 여자를 나 같은 놈 때문에 고생시킬 순 없다. 그래서 둘째는 군대 간 사이에도 그를 기다리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통보를 했다. 그날 200만 원 중에 20만 원이나 되는 돈을 술값과 사이드 미러 보상비로 지출했다. 술에 취해 세상을 저주하다 국산차 사이드미러를 날아 차기로 허공에 띄웠기 때문이다.


잡부 일을 며칠  죽자고 하면서 먹고 썼는데 다시 수중의 돈이 200만 원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며칠 동안 고민해오던 자신의 미래를 결정했다.


뭘 하든 천억을 벌자.



파우스트의 악마가 온다면 영혼을 팔아서 천억을 벌고 싶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2019년이 되었다. 그 사나이는 천억보다 좀 더 넘치는 재산을 모았다. 정확히 20년이 걸렸다.


앞으로 20년은 1조를 버는 게 목표야.
뭘 해도 괜찮아. 1조만 벌면 돼.


룸살롱이나 강남  바보다 우리는 삼겹살집과 잡회집을 좋아한다. 강남 3대 참치 집도 좋아하고 텐프로 룸살롱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척해야 할 때만 일부러 티를 내준다. 그게 우리들이 하는 일이니까.


둘 다 참 부모 복이 없다. 고아보다 나을 게 없이 살았는데, 오히려 나이 들어서는 누구보다 부모에게 더 많이 경제적으로 지원한다. 고마워서나 남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가 아니라, 그까짓 돈 정도는 신경 쓸 범위도 아니기 때문이다.


참, 우리 부모들은 자식복도 많아, 그렇지?



우리는 정말 고생했다. 그래서 지금도 재산이라 매겨지는 숫자는 중학교 수학시간 문제같다. 시험에만 나오고 내 생활과는 무관한 수학 문제처럼.


중국집 둘째 아들인 내 친구는 주식으로 을 벌었다. 잡부일을 기다리는 시간, 일을 끝내고 돌아온 밤 시간, 그는 헌책방에서 산 주식책은 샅샅이 읽고 외웠다. 그리고 200만 원을 밑천으로 주식 매매를 시작했다.


이상하게 주식을 사면 바로 떨어져.
지금 잔고 주식이 110만 원이야.
다 날리면 난 죽을 거야.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정말 열심히 분석했는데, 실제 주가는 조금 오르고 크게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사면 떨어지고, 팔면 하루 이틀 이후에 상을 치기도 했다. 그쯤 되니 온 국민의 레퍼토리가 나왔다.


난 주식이랑 안 맞나 봐.



친구는 남은 110만 원이 '마지막 잎새'인양 좌절했다. 그리고 3년 동안 친구를 보지 못했다. 당시 중국 현지에 진출해 IT부품 공장을 자회사로 설립해 한국 대기업에 납품하느라 가족과도 생이별해 있었다.


현충일이었다. 나는 친구와 미사리 민물매운탕 집에서 낮술에 취했다. 친구는 주식으로만 전업해 밤낮으로 주요 국가의 증시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제 5억 만들었다. 시작이 반이잖아.
5년이면 백억 될 거야.



친구는 5 년 후, 그러니까 200만 원이 110만 원이 된 8년 넘은 후에 100억을 벌었다. 그리고 코스닥 상장사를 인수했다. 미쳤나 싶었는데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올해 친구는 종합금융그룹의 회장으로 불린다. 조그마한 은행과 투자사까지 두루 자금줄을 손에 쥐었고, 그들의 회장이 되었다.


중국집 둘째 아들이 말한 주식투자의 노하우는 간단했다.

그 친구는 절대 주식에 투자한 적이 없다고 했다. 110만 원으로 반토막난 후 깨달았다고 했다. 한 주를 사더라도 반드시 30%를 먹어야 내다 팔았다. 30% 수익이 될 때까지 한 종목에만 목숨을 걸어 싸웠다고 한다. 상한가 최고 변동률이 15%였던 당시의 사정을 보면 너무나 공격적이다. 그래서 사고팔기를 전투처럼 치렀다고 했다.

7% 이상 오르면 팔고 반드시 내릴 때까지 기다려 주식을 산 후, 무조건 7% 이상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철칙이 있었다.

하나는, 저평가 우량주 외에는 어떤 유혹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감사보고서 시즌에  상장폐지 우려가 전혀 없는 우량주에서만 맘 놓고 공격적으로 전투한 것이다.

둘째는, 그중에서도 계절 영향을 받는 주식에는 투자비중을 제일 크게 뒀다고 한다. 일 년에 서너 번 이상은 무조건 30%  수익을 안겨준다고 했다. 참고 인내하며 신저가와 신고가의 문턱을 믿어야 한다.

셋째는, 지인의 돈을 끌어들였다. 투자주식 가운데 위의 두 번째 주식에는 신저가에서 무슨 짓을 해서든 돈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전주에겐 수익의 30%를 배분하고 나머지 70%를 친구가 챙겼다.

넷째, 위의 3개 조건에 적합한 종목이 없을 때는 절대 주식을 하지 않았다. 전업 투자자가 주식을 하지 않는 일자가 1년의 3분의 1이 넘었다고 했다. 이것만 참아내면 절대 손실을 보지 않는다고 했다.

다섯째, 투자를 실행한 종목의 주가가 떨어지더라도 낙담하지 않는다. 친구는 초기 몇년동안 공사장 잡부와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주가가 예상보다 떨어진 종목의 주식을 계속 샀다. 몇달치 막노동으로 번 돈을 하루에 날려버리기도 했지만 자신을 믿고 버텼고 평균매수가는 계속해서 낮췄다.

이것으로만 백억 현금을 친구는 만들었다.
그리고 백억을 시드머니로 기업 M&A를 통해 올해 천억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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