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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19. 2019

20년 전 태어난 아들이 두 번째 수능을 치른다

시험 무난히 치길 바래.

내가 벤처기업을 어떻게 세워볼까 친구들과 한참을 고민하던 20년 전. 아들이 태어났다. 그 아들이 작년이 이어 올해 또 한 번 대학입시 수학능력시험을 치른다. 작년보다 더 힘들어하는데, 지켜봐 보는 것 외에 해줄 게 없다. 자꾸 욕심이 떠오르는데, 미안하게도 20년 전 아들이 태어나던 그 날이 떠오른다. 수능 결과에 깊이 빠지지 말라는 심금의 울림인가, 아들에게 미안해진다. 그래서 아들에게, 아들이 언젠가 보기를 바라며, 그때의 심경으로 아들을 위한 편지를 남긴다. 그때와 달리 내가 변한 걸 잘 아는데, 그때의 다짐을 지금 무색하게 만든 내가, 새롭게 그날의 감사함을 다해 보고 싶다. 


손가락이 5개만 있기를 바랐던 내가, 아들이 명문대를 입학해 엘리트로 살기를 바라고 있으니. 난 망각의 물고기가 맞다.




 아빠와 엄마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 여기며 이 세상에 태어나기를 기다려 온 우리 '땡칠이(네 태명이란다)'를 처음 본 순간, 아빠는 온몸이 얼어 버렸어. 귀가 있어도 주변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코가 있어도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맡아지지 않았단다. 입이 있어도 너를 처음 본 순간에는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지. 하지만 내 눈만은 우리 '땡칠이'를 한 폭에 감싸 안으며 작은 망막 속으로 네 몸 구석구석을 담아 새겼단다. 그리고 차마 뜨지 못한 네 눈을 바라보며 눈꺼풀을 넘어선 우리 둘만의 눈 맞춤이 너무나 황홀해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었단다.

당시 아빠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하나님께 우리 '땡칠이'를 안겨 주신 데 대해 눈물겹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되더구나. 아직도 아빠는 갓 태어난 너를 안고 '이 아기가 땡칠이에요.'라고 말해줬던 '김난생'이라는 간호사님을 기억해. 너를 안고 있던 간호사님의 허리에 달린 명찰이 아빠의 망막에 함께 새겨졌을 거야. 신생아실로 너를 데려가려 뒤돌아서는데 아빠는 눈마저 얼어붙어 망부석처럼 굳어 허연 적막만을 보았단다.

육체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네가 사라져 가는 모습에도 아빠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얼이 빠졌버렸지. 그만큼 아빠도 그때는 너무나 어리고 연약했단다. 지금의 네 나이와 불과 예닐곱 밖에 차이가 없으니 그때의 아빠를 네가 상상해 보렴. 아빠는 이내 엄마를 찾아 병실로 가려는데 야박한 병원의 선결제가 먼저이더구나. 정신없이 불러주는 대로 대답하고 결제한 뒤에야 엄마가 있다는 병원 맨 위층의 조리실로 갈 수 있었단다. 아빠의 인기척에 축 늘어진 실눈으로 아빠를 알아본 네 엄마를 보면서 아빠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었었어.

하나 된 몸으로 열 달을 함께 살았던 네 엄마가 불과 10여분 만에 너를 떨어뜨린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생각하니 네 엄마에게 아빠는 너무나 미안했었어. 너를 이 세상에 낳아 준 엄마의 고통을 아빠는 평생 동안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단다. 네 엄마는 애써 힘든 내색을 숨기며 누가 보아도 웃기조차 힘들어하는 표정으로 울먹이는 아빠를 아빠의 엄마처럼 달래줬단다. 그 순간 아빠는 너의 아빠이기도 했지만 네 엄마의 아들이기도 했지.



"땡칠이는 봤어?"



네 엄마가 아빠에게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어. 지금 생각하면 마치 성모 마리아 님의 자애로운 목소리가 네 엄마에게서 들렸던 것 같아.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눈치챈 아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어. 그리고 엄마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말했어.



"머리는 맑은데 너무 힘들어."


눈을 감은 네 엄마를 내려보며 아빠는 엄마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병원의 담요 이불을 덮어주며 한 손으로는 천천히 담요 위를 타독거렸단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엄마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아빠의 체온을 전해줬어. 네가 이 세상에 나오는 바람에 공허해졌을 엄마의 빈 속을 아빠의 사랑으로 채우고 싶었서였어. 엄마는 아빠의 바람을 알았는지 금세 조용히 잠이 들었단다.

엄마가 잠든 틈에 급히 집에 들러 엄마가 입을 옷가지를 가방에 챙겨 오는데, 생소한 산부인과 병원의 구조가 별안간 궁금해지는 게 아니겠어. 네가 어디 있는지 그리고 네가 잘 살아 있는지 알고 싶었고, 네가 보고 싶어 신생아실이 있을 법한 공간을 찾아다녔단다. 쑥스러워 누구에게 묻지 않고 아빠 혼자 어림짐작으로 찾아 나섰던 거야. 그리고 어렵지 않게 신생아실 팻말을 발견해 넓은 윈도우 너머로 너를 찾아냈단다.

붉그스레한 피부에 눈을 감은 모습, 몇 되지 않는 머리칼, 양손을 움켜쥔 몸가짐이 목판에서 찍어낸 판화처럼 똑같은 신생아들이 할인매장의 진열 상품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지. 손질하는 작가의 힘 조절이 자아낸 미세한 차이가 판화에서 보이듯이 신생아실의 아기들에게는 아주 미미한 차이만 느껴졌을 분이었어. 하지만 태곳적 짐승의 본능이 아빠에게 힘을 미쳤는지 두어 번의 두리번거림으로도 우리 '땡칠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단다. 분명히 땡칠이가 맞을 거라는 아빠의 판단은 틀림없었고 네가 담긴 아기 바구니에 가로 적힌 네 엄마 이름으로 다시 확인했단다.

마치 금붕어가 물속에서 뻐꿈거리는 모양처럼 네가 아빠 보란 듯이 조그만 입을 연신 오물거리더구나. 마치 성능 좋은 카메라가 갑자기 줌인이라도 한 양, 아빠의 시야에는 오로지 네 얼굴과 네 입술만이 크게 확대됐단다. 그래서인 네 입술의 주름 하나까지 한 틈도 놓치지 않으려고 아빠는 온 신경을 집중했었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휙 흔들던 손동작을 네가 해 보이자 아빠는 깜짝 놀랐단다. 그러다가 미간을 모으는 듯한 표정 변화가 느껴져 아빠는 목을 길게 내 빼고 너를 놓치지 않고 담았단다.

산모 조리실로 돌아온 아빠는 마침 잠에서 깨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엄마에게 인사 대신 자랑을 늘어놓았어.
"땡칠이 보고 왔어. 살아 움직이는 게 너무 신기해."
아빠의 자랑에 엄마는 이내 시샘이라도 하듯이 '우리 땡칠이 보고 싶어.'라고 어리광을 부렸지. 아빠가 없던 틈에 들른 간호사가 엄마에게 한 말로는 그날 저녁이나 되면 신생아실 앞에서 널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는 거야.

혹시라도 먼저 볼 수 없을까 하는 마음에 아빠가 신생아실에 부탁하려는데 엄마가 가로막았어. 조금 더 기다렸다가 방으로 데려와 젖을 물리고 싶다는 엄마의 말이 있었지. 아빠는 조급함을 달래며 네 일가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너의 탄생을 축복받았단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네가 아빠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줬던 거야. 다시 한번 아빠는 네게 그리고 엄마에게 큰 은혜를 받았단다.

저녁 시간이 지나 8시쯤 되었을 때, 엄마가 인터폰으로 야간조 간호사님에게 부탁했지.


 "우리 땡칠이 잘 있나요?
제가 방에서 젖을 물리면 안 될까요?"


간호사님은 마침 땡칠이가 잘 자고 깬 것 같다면서 잠시 올려 보내겠다고 했어. 우리는 조리실 방에서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지. 엄마는 소중하고 어여쁜 진주를 만지듯 가슴을 문지르며 너를 기다렸어. 여자로 태어난 처음으로 자기 가슴을 새 생명에게 내주는 기쁨을 엄마는 그 순간 실컷 만끽했을 거야.

이삼십 분 동안 엄마는 젖쪽지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고 하면서도 절대 널 떼어 놓지 않더구나. 아빠는 속이 상해 엄마에게 잠시 너를 떼어 놓고 병원에서 주는 젖병을 물리라고 했지. 한사코 네 엄마는 괜찮다며 네 꼬물거리는 입만 쳐다보지 않겠니. 그런데 아파하는 네 엄마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젖꼭지를 쪽쪽 빠는 네 모습이 점점 힘겨워 보이더구나. 잠시 엄마가 젖꼭지를 바꾸어 금세 고양이 울음을 하던 네 입으로 다른 젖꼭지를 옮겨줬단다.



"이런 바보같이"



금세 시간이 흘러 처음 보는 나이 든 간호사님이 너를 신생아실로 다시 데려가려고 우리 방으로 들어왔을 때였지. 능숙한 솜씨로 네 입술 옆으로 젖병 꼭지를 대어 보는데 네가 미친 듯이 젖꼭지를 따라 입술을 움직이는 게 아니겠어. 멀뚱 거리며 그 의미를 몰랐던 아빠와 엄마에게 간호사가 말했단다.



"지금까지 젖 물리신 거 아니에요?"



아뿔싸, 처음 아빠와 엄마가 된 우리는 너무나 무지했지 뭐야. 출산 당일에 첫 애를 낳은 네 엄마에게 젖이 돌려면 며칠이나 지나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단다. 간호사의 말에 엄마와 아빠는 한참이나 배꼽을 잡고 웃었지. 그리고 이 세상 태어나 네게 처음으로 준 것이 빈 젖이라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래서 네가 그렇게 힘겹게 뻘뻘거리며 젖을 오랫동안 빨았구나, 굳이 세상의 역경을 첫날부터 맛보게 했구나, 싶어 너무나 미안했어.

간호사가 물려준 젖병의 분유를 꿀꺽거리며 삼키는 모습을 보고서야 미안함이 사라지고 대신 사랑스러움이 샘솟았지. 그렇게 너와 우리는 이 세상 처음으로 눈과 살을 맞대는 경험을 코미디로 시작했단다. 며칠을 미안한 마음으로 엄마는 감히 젖을 물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아빠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다짐했단다.



"다시는 우리 아기 힘들게 만들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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