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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18. 2019

외조하는 남편들이 모두 저와 같은 심정일까요?

미안하다. 사랑한다.

여보, 언제 들어와?


아내가 남편에게 묻는 말이 아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건네는 대화의 일방이다. 기가 차는지 아내가 헛웃음을 터트린다. 난 진지하게 정말 궁금한데, 아내는 장난이라 여긴다.


다녀올게. 저녁은 어디서 사 먹어요.



그래도 내가 먹을 밥 걱정해 주는 건 자기뿐이네. 이 말이 뭐가 우스운지 현관문을 열다 아내가 자지러진다. 고마워, 좋게 받아줘서, 웃음을 그치지 않으며 끝까지 말을 끝낸다.


혼자 우두커니 TV를 보다가, 무슨 프로그램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거실을 사방으로 둘러봤다. 역시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 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지루한 몸이 뭐라도 해야겠다고 서두르는 맘을 따라 부엌에 들었다. 싱크대에 빈그릇과 컵들이 가득하다. 설거지 하자.


작년부터 아내가 비우는 집안 자리가 더욱 허전해 보여 가끔 내가 그곳을 채웠다. 설거지하는 싱크대, 빨래 바구니와 세탁기, 빨래 너는 건조대. 그리고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다. 무선청소기와 스팀청소기가 그들이다. 설거지를 끝내고 로봇청소기가 집안을 다 돌 때까지 휴식을 가진다. 그리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려 무선청소기로 구석을 마감하고 스팀청소기로 한바탕 긴 땀을 흘리면 그만이다. 내가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집 지키기 놀이다.


더 진을 빼고 싶어 멈추지 않으면, 세탁기를 두 번 돌리고 건조대 두 대에 빨래까지 촘촘히 모두 건다. 마르는데 시간이 걸려 아직 개어본 적이 없다. 항상 저녁에 침대에 들기 전, 방바닥에 주저 않아 아내가 마무리하는 일과다. 오늘은 이걸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뭘 더 할까?


화분들이 조르륵 한줄 서 있는 게 눈에 들었다. 물 줄까? 부엌에서 한참을 찾는데 적당한 물뿌리개가 없다. 잠시 머리를 굴리다 쓰레기함에 찌그러진 빈 페트병이 보였다. 콜라 병뚜껑을 돌려 빼 가스불에 지진 젓가락으로 구멍을 냈다. 물을 담아 거꾸로 세우니 그럴싸한 물뿌리개로 변신했다. 1.5리터 들이를 세 번 퍼 날라서야 모든 화분이 물을 머금었다.


사람이란 나를 아주 이기적으로 챙기는 동물인데, 어떤 이에게는 아주 이타적으로 내어줄 때가 있다. 오늘 내가 아내에게 이타적 존재로 내어주는 날인가 보다. 아내가 인생 2막을 위해 인생 처음 자기 일을 시작했다. 굳이 말리거나 의기소침하게 기죽이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잘해보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하겠다는 아내에게, 만류도 응원도 하지 않는 애매한 내 마음이 방관적이었다.


아내는 캐리어를 끄는 여성 CEO이다. 스타트업을 창업했지만 아직 직원이나 동료 없이 혼자 일을 한다. 함께 일하려는 몇 사람이 있어 큰 도움을 받지만 조직으로 여길 만큼 일거리도 수익도 없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경비를 아끼려고 캐리어를 끈다.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곳이라면 찾아가서 컨설팅하는데, 그래서 캐리어는 아내의 사업 필수품이 되었다.


잘 차려 입고 나가더라도 캐리어를 끄는 아내 모습은 내 자손심에 상처를 입힌다. 별거 아닌데도,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데도, 그걸 잘 알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다. 오늘도 아내는 캐리어를 끌고 갔다. 그래서 아내의 빈자리가 애잔하다. 나는 더 미안하고 허전해진다. 그러면서 못난 자존감에 위안받는다.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미안한 마음과 허전한 심정이 내 정성을 발동시켰다. 아내가 유튜브 방송을 하려고 자기가 짜 본 기획을 내게 들려 주었다. 계약서가 여러 개  필요한 일이었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할 인간관계였다. 법률지식과 사업 경험을 십분 써먹을 기회다. 그래서 아내가 아직 겪지 못한 미래의 분쟁거리가 싹을 틔우기 전에 뿌리까지 잘라주었다. 2부의 서로 다른 계약서를 서슬 퍼런 문구와 조항으로 새겨 넣었다. 나 없이도 언젠가 아내가 혼자 힘으로 사용할 수 있게 촘촘히 자세히 작성해 메일로 보내주었다. 


아내가 맡긴 옷들을 배달하러 오신 세탁소 사장님과 몇 번째 인사를 텄다. 고맙다는 말과 몇 가지 정부 욕을 나누었다. 비닐 커버에 갇힌 여러 벌을 들고 옷방에 그대로 걸었다. 예전엔 세탁소 옷들이라면 거의 내가 입던 와이셔츠였을텐데, 이젠 눈 씻고도 볼 수 없다. 아내의 정장이 여러 벌이다.


포터블 옷걸이에 아내의 흰 셔츠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다려줄까? 다리미가 어디 있나? 다림질대는 어디 있나? 애써 찾아 신나게 다리니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구나, 싶었다.


아내는 21년 동안 사업하던 나를 위해 헌신했다. 아내 같은 아내가 세상에 또 있을 거란 믿음을 없애줄 정도였다. 내 아내는 나만을 위해 내조했다. 종처럼, 때로는 엄마처럼.


이제는 내가 아내를 위해 나설 때다. 아내에게도 외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내가 채워주고 싶다. 채워서 헌신해주고 싶다. 아내가 나에게 준 헌신보다 +1만 더해 주고 싶다.


며칠 이러는 외조살이 놀이가 그다지 나쁘지 않다. 왜 지금껏 돌아보고 쉬어보지 못했나, 싶어 내 청춘과 아내의 젊은 날에게 죄책감이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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