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숨을 쉬지 않는다. 미동도 없고 숨결도 들리지 않는다. 아내의 살아있는 생기를 느낄 수 없다. 잠시. 정말 십 초도 되지 않을 시간 동안, 아내의 차가움을 느꼈다. 덜컥 겁이 났다. 이래선 안 된다는 경종이 귓가를 세차게 울렸고,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온몸을 일으켜 힘껏 그녀를 흔들었다. 제발, 여보!
아내는 다행히 정신을 차렸고 놀란 눈에 겁을 잔뜩 뒤엎은 채 나를 쳐다봤다. 다행이야, 여보. 난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내는 죽지 않았다. 뜨거운 불에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밀랍처럼 차가워 보였던 아내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그녀는 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달래 주었다. 아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다행이다, 감사했다.
자기 정말 숨 넘어가는 줄 알았어,
코를 골다 어떻게 갑자기 숨을 멈추면 어떡해? 내일 병원 가보자.
잠에서 깨지 않은 아내는 "에이~ 씨, 장난 말고 빨리 자."라는 간단한 문장만 쇳소리와 함께 남긴 채 다시 이불을 걷어 올렸다. 이제는 코를 골지 않는구나. 다행이다 싶어서 가로눕기 편한 아내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 누웠다. 그리고 어둠의 빛을 껐다. 잠이 드나, 잠이 드나, 싶은데 또다시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좀!!! 여보!!! 잠 좀 자자."
표지의 사진 속 노부부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미의 가치보다 삶의 가치가 느껴져서 아름답게 보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거의 50년을 살아야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 든다. 50년이라. 앞으로 난 27년을 아내와 더 살면 된다. 그럼 나도 저런 모습으로 아내와 살 수 있을까? 우리도 저렇게 아름다운 삶을 사진 몇 장에 남길 수 있을까?
문제는 단 하나, 나와 아내가 앞으로 27년을 살 수 있을까? 라는 기초적인 의문에 봉착한다.
결혼 전 깡마른 체격으로 키가 178센티미터이면서도 몸무게가 65킬로그램에 머물던 시절을 나는 회상한다. 물론 아내가 아닌 나의 이야기다. 허리가 아마 26인치인가 당시 연애하던 아내와 엇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던 나는 언제까지나 내 몸무게가 이 정도에서 놀아날 것이라 여기며, 배 나온 아저씨의 모습은 나와 다른 저질스런 유전자의 발로라고 우스워했다. "난 아무리 먹고 마셔도 몸이 변하지 않아.", 정말 그렇게 자신했고 사실처럼 확신했다.
아내가 아들을 낳던 날, 내 몸무게는 78킬로그램이 되었다. 10개월 동안 10킬로그램 이상 늘었다. 아내는 아들을 낳아서 늘어난 몸무게가 줄었지만, 내 몸무게는 둘째를 다시 임신한 듯했다. 85킬로그램을 겪고 난 뒤, 그제는 내 몸이 8자를 고스란히 인정해 받아들였다. 얼마 전 9자의 급습이 있었는데 나는 놀라 자빠질 것 같았다. 간단한 식이요법과 저녁 음주를 줄여 9자의 반란을 한 달 만에 척결했다. 이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느꼈다. 8자를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이제 오욕의 과거를 벗고 나를 둘러싼 두꺼운 지방의 방벽을 걷어낼 것인가, 그래서 7자가 독립되는 그날을 향해 칼을 빼들 것인가?
나이 사십 중반을 넘자 무릎은 움직일 때마다 자기가 일한다는 신호를 "삐걱"거리는 소리로 공연히 드러낸다. 그리고 허벅지는 더 이상 나의 상체를 버티고 싶지 않다며 쉽게 근육의 이완을 포기한다. 그뿐이면 다행인데, 방광도 요도도 이제 내 말을 듣지 않고 자율적 판단으로 개폐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8자가 이놈들을 회유하여 포섭한 결과이다. 더 이상 나의 7자를 숨기며 살 수 없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칼을 빼들었다.
복싱을 매일, 주말 빼고, 하다 보면 '원투' 펀치 새도우에도 쉽게 뱃살의 출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사정없이 샌드백을 치고 미트질을 하고 쉴 때 턱에서 뱃살 위로 흐르는 땀을 느끼며, 8자가 죽어가는 쾌감에 만족한다. 반드시 죽여 없애겠다. 석 달이 지났다.
어라, 몸무게가 안 변하네?
8자를 숙청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신 8자를 나의 충복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뱃살은 둥근달을 하늘로 보내고 절벽을 만들어냈다. 가슴이 배와 같은 경도를 가진 게 얼마만인지, 하루하루 배를 만지며 감탄한다. 20년이 지났지? 이젠 양치하다 혹은 면도하다 하얀 거품이 배도 아닌 명치를 덮는 일이 사라졌다. 바닥에 하얀 거품이 떨어져 괜히 청소할 일만 생겨도 난 행복하다.
계단을 오르는 내 몸이 어느 날부터인지 좌우로 엉덩이를 흔들며 사뿐히 뛰어 올라갔다. 오르막을 걷는 두 다리는 허벅지의 강력한 힘으로 지구를 압박하는 반중력을 내뿜고 있다. 나는 슬림해졌다. 턱살이 빠지고 세 겹의 턱선이 친구를 잃어 홀로 된 턱선 하나만이 외로이 나를 지키고 있다.
여보, 옷이 너무 헐렁해, 다시 살 찌울까?
나의 비겁한 변명에 아내는 생전 보지 못한 가늘고 긴 눈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번 더 입 밖에 내다간 어찌할지 모른다는 통첩을 나는 분명히 들었다. 아내는 입 속으로 그 말을 조용히 삼켜는데도 나는 그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우린 역시 부부인가 보다, 허탈한 동료애에 만족했다.
갱년기에 접어든 아내는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상기도 근육이 영향을 받아 기도가 좁아졌다. 열심히 몸매 관리를 했지만 늘어난 체지방이 기관지 속 공간을 좁히면서, 아내에게 코골이가 생겼고 수면무호흡증이 발병했다. 여성 갱년기 이전의 남녀 코골이 비율이 3대1 정도라면, 갱년기 후 남녀 코골이 환자의 비율은 1대1로 대등해진다고 한다.
아내가 돌연사할 위기에 빠졌다.
27년을 더 살기 위해서는 죽지 않고 갱년기를 지나야 한다. 돌연사는 우리 부부의 삶이 완성될 기회를 앗아가는 검은 악마다. 의식 없이 예상하지 못한 찰나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다는 생각이 아니지만,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싶다. 검은 악마의 유혹이 묘쟁이의 목숨을 앗아갈진 몰라도, 나와 아내의 목숨에는 어림도 없는 오욕이다. 나는 아내와 나머지 27년을 돌연사 없이 건강하게 보내고, 저 러시아 노부부의 스틸컷보다 멋진 삶을 사진 열 장에 남기고 떠나고 싶다. "우리 이만하면 행복했다", 라고 말이다.
복싱 체육관을 다녀와 아직 숨을 고르지 못하는데, 아내는 피트니스 PT를 받으러 갔다. 술값 줄이고 식비 줄여서라도 이제는 돌연사를 막는데 집중하자, 아내에게 건투를 그리고 나에게 건투를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