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메바 라이팅 Feb 18. 2020

사랑 vs 의리, 잊어버린 열혈남아

不忘了我

검푸른 밤하늘의 삐뚤어진 야경을 스치듯 관음 했다. 1분도 지켜볼 만큼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쓸쓸한 자정을 홀로 맞다, 침대에 드러누워 케이블 영화 채널을 입력했다.


웬 빤스 입은 남자랑 여자냐?


철 지난 홍콩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눈 작은 인형처럼 생긴 홍콩 여배우가 젊은 시절 유덕화 곁을 쌍둥이처럼 걷는다.



유덕화의 빤스 같은 반바지와 대칭을 이루는 미니스커트가 어울린다 생각했는데, 잠시의 흐뭇했던 미소가 올드패션의 옛 기억이 깊숙히 담긴 폴더 속에서 장만옥을 발견했다.


남자 배우와 키나 몸집이 비슷했던 우리 젊었던 시대의 Femme Nostalgia, 장만옥이었다.



나는 중학생 시절 일본 영화와 드라마에 흠뻑 빠졌었다. 고등학생 시절 광풍처럼 몰아쳤던 홍콩의 각종 시리즈 영화에 모두가 열광했지만, 그 흔했던 영웅본색도 보지 않았다. 물론 소피 마르소도 내겐 역외의 흥미였다.


갑자기 심취했던 헤비메탈과 하드락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는데 혈안이었다. 주말마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름이지만 테이프 디자인이 헤비메탈처럼 보이기라도 하면 긁어 사 모았다. 지금처럼 들어보고 살 수 있는 환경이나 배려가 없던 투박한 아날로그적 상업행위가 헤비메탈 테이프를 내다 파는 가게 주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극장 앞을 줄지은 나또래의 남녀들이 흔했고, 페인트칠처럼 어색하게 극장 지붕 밑을 가득 채우던 포스터 간판이 '들어 와봐?'라고 귓가를 속삭이는 듯했다.


어쩌다 그때 봤던 몇 되지 않는 영화가 '열혈남아'와 '폴리스스토리'였다. 유덕화와 함께 한 장만옥, 그리고 성룡과 함께 한 장만옥. 같은 얼굴이지만 분위기와 눈빛이 달랐던 장만옥이 '열혈남아'에서 너무 좋았다.



忘了你 忘了我, 왕걸이 부르는 OST는 기가 막히게 왕가위가 연출한 장만옥의 걱정 어린 우울함과 걱정하지 말라는 유덕화의 애틋한 선글라스 표정 사이에서, '분명히 히트곡이 되겠구나'라는 서늘한 감동을 안겼다.


https://youtu.be/pWK2JSgG9ro


나는 잊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 한 버스 앞 저 장면을.


울음을 머금은 젊은 여자가 평범한 바램을 가득 담아 사랑을 놓지 않으려 할 때, '곧 다녀올게' 라는 말을 억지로 삼키던 한 남자가 애처롭게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바로  장면.


잔망에 각인된 감동의 데자뷰가 아내와의 연애 시절에도 있었다는 걸 잊고 살았다.
그 표정과 그 장면을 우리가 똑같이 나누었구나, 그걸 잊고 살았다.


오랜만에 글 쓰고 싶다는 애틋함이 넘쳐올랐다. 그러자 검푸르게 뒤틀렸던 자정의 야경이 수십 년 전 파릇한 추억의 버스 앞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버스 밖 어린 아내를 달래는 나의 모습이 처연히 보였다.


잊고 살았다. 나는 내 사랑을 찾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부부는 돌연사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