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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25. 2019

루이비통은 되고 고야드, 발리는  안됐다?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지금의 파리를 대표하는 도심구역, 몽마르뜨, 카페와 레스토랑 거리 등은 19세기 후반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만 남작과 함께 시작한 파리 도시 정비 사업으로 만들어졌다.


19세기에는 유럽 미술가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전 세계 문학가들의 도피처가 되었다. 그래서 도시 정비와 함께 파리는 세계 문화ㆍ예술의 메카로 독보적 입지를 누렸고, 그들 속에서 피어난 사랑과 연애 스토리는 아직까지 뭇여성들의 로망으로 각인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파리 증후군으로 쓰러지는 아시안 여성들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파리하면 떠올리는 아이템이 있다. 명품이라 부르는 럭셔리 의류, 화장품, 향수 등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대표하는 명품 럭셔리 브랜드에는 우연찮게도 또다시 나폴레옹 3세의 역할이 있었다. 정확히는 그의 아내인 외젠 왕비로 인해 프랑스 브랜드가 만들어졌다. 나폴레옹 3세 부부가 지금의 파리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53년 대통령에서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18살이나 어린 스페인 출신 귀족 외제니와 결혼하는데, 외제니는 마리 앙트와네트가 되고 싶었다.


외제니 왕비와 시녀들


결과적으로 보불전쟁에 패해 이들 부부는 망명지 영국에서 모두 쓸쓸히 생을 마치는데, 나폴레옹 3세 부부가 의외로 프랑스에 남긴 영향이 매우 긍정적이다. 특히 나폴레옹 3세는 문화예술품을 많이 사들이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사실주의, 신고전주의 등의 화가들이 대성했고 이에 반항하는 인상파 화가들도 황제의 구매욕을 만족시키려 발버둥 다.


외제니 왕후는 한번 입은 옷을 절대 다시 입지 않기로 유명했다. 더욱이 당시  궁정 여인들은 하루에 옷을 5번 이상 갈아입는 게 규범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한번 입은 옷을 다시 입지 않는 왕후로 인해, 럭셔리 브랜드가 호황을 이뤘다.


스페인에서 시집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기라도 하면, 40여 일간 황후가 입을 옷, 화장품, 액세서리, 가발 등을 실어 날라야 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럭셔리 사치품들이 포장되어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태어난 브랜드가 루이 비통이다. 외제니가 입을 드레스, 화장품, 향수 등을 실어 나를 상자와 가방이 필요했는데, 이때 외제니의 눈에 띄어 성공한 사람이 루이비통이다.

나무상자로 만든 케이스는 온갖 드레스에서 침대까지 접어 넣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책장과 애완동물까지 넣을 수 있는 가방을 만들어 외제니 왕비에게 납품했다.


당시 외제니는 루이비통을 예쁘게 봐서 파리에 매장까지 내어줬는데, 이후 철도가 확장되면서 여행객이 폭증하자 루이비통의 가방은 엄청난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불티나게 팔린다.


한때 외제니 황후는 루이비통에 앞서 고야드를 채용했으나 결국 어린 루이비통의 센스에 반했다고 한다. 이후 발리의 도전이 거셌지만 유일한 승자는 루이비통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별난 외제니가 썼던 향수는 얼마나 좋은 레시피에 럭셔리했을까? 외제니가 선택한 향수가 바로 겔랑이다.


겔랑이 출시한 오드콜롱 임페리얼에 흠뻑 빠졌던 외제니는 왕후가 되자마자 겔랑을 1853년 왕실 공식 향수 공급자로 선정했다.


미백 화장이 대유행이던 그 시절에, 파리를 사로잡은 화장품은 바로 불리 Buly였다.



미술품 구매에 열올리던 나폴레옹 3세에 의해서 당대 유명 미술가들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었고, 아내인 외제니가 마리 앙뜨와네뜨를 닮으려던 사치벽은 프랑스 명품 럭셔리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부부가 식민 정책으로 강탈한 보석과 문화재는 루브르 박물관을 가득 채웠다. 또한 파리 도시정비사업은 지금의 파리 거리를 만들었다.


소비와 강탈의 미학이 긍정적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산으로 돌아온 아이러니의 역사다. 낭비가 생산을 반영구화한 모순의 세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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