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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Oct 27. 2019

나는 매일 오페라 50곡을 듣고 인내를 배운다

[사장은 아무나 하나요?]

나는 오페라 아리아 50곡을 유튜브 재생 목록에 담아 매일 듣는다. 가요나 팝에 비해 무지 긴 오페라 아리아를 50곡이나 매일 듣는다. 세상의 소리를 차단하고 싶을 때, 나만의 시공간을 갖고 싶을 때, 그리고 평정심을 찾아야 할 때, 나는 유튜브에 담은 아리아를 듣는다. 하루 두 세 곡만 들을 수도 있고, 하루 50곡 이상을 반복해 들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난 1년 2개월 동안 매일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다.


모두가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이 듣는 트로트 뽕짝 외에는 다른 음악을 들을 기회란 있을 수 없었다. 학교 음악 시간은 현실의 음악 환경과 괴리가 너무 컸다. 갑자기 가곡을 배우고 모차르트를 배워봐야 나와 무관한 저 세상의 시험문제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음악이 아니라 암기하는 음학 교과목이었다. 음악 감상은 학교 생활 동안 들어본 적 없었고, 음악 선생님의 유일한 애장품인 피아노 한 대로 음학을 암기하기 바빴다. 그것도 매를 맞지 않기 위해서.


젊어서는 파격적으로 하드 락과 헤비메탈에 빠졌다. 조그만 카세트에 꽂힌 이어폰에서 쿵쾅거리는 하드 락의 전자음이 질풍노도의 반항심을 증폭시켰다. 그 보다 조금 더 나이를 먹자, 노래방과 룸살롱에서만 음악을 듣고 불렀다. 술에 취해 음주가무를 즐길 때만 음악 비슷한 것이라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일, 일, 또 일.



4년 전 11월 스산하던 늦가을. 가족과 함께  빈 여행을 갔다. 여행은 무계획으로 정체 없이 가고 본다, 라는 내 신조를 가족들이 순순히 따라줬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앞 호텔에서 여장을 푼 뒤, 차가운 공기에 화들짝 놀라고 빈을 뽐내던 오페라 극장의 고풍스러움에 환호했다. 오페라 극장은 우연히 호텔 옆에 있었을 뿐, 우리 가족 여행에서 고려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오페라 하나 봐요.



아들이 선창하고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은 민관이 외지 관광객들에게 탄력적인 티켓 판매 서비스를 제공한다. 오페라를 봐 볼까, 살짝 고민하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고갯짓을 두어 번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마치 합스부르그 왕가의 시종들이 입었을 듯한 연미복과 가발을 쓴 소위 '삐끼'들이 다가와, 오늘의 공연과 간단한 줄거리를 읊으며 어떤 감동을 선사하는지 길게 설명한다. 티켓을 살 때까지.


오페라 극장 좌석마다 자막이 여러 언어의 문자로 표시되어 이해하기 쉬웠고, 내 주변 자리를 점령한 오스트리아 할머니들의 감동 어린 리액션과 손수건을 적시는 눈물이 감동을 더 해 준다. 난 솔직히 그때 본 오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얼마나 유명한 공연인지 전혀 몰랐다. 웬 여자아이가 부대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내용이라는 정도는 눈치 챘는데, 2시간 내내 울던 옆 자리 할머니와 달리 난 별 감흥이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내가 본 오페라는 그 유명한 도니제티의 <연대의 딸>이었다. 나는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아는 만큼 들린다는 진리를 되뇌인다.


정작 값비싼 티켓값을 치른 <연대의 딸>보다 내 인생에 오페라 아리아의 감동을 최초로 선사했던 공연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5인조의 간이 악단이 펼친 공연이었다. 1인당 단돈 10유로에 저녁 식사 후 2시간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돈 조반니 공연의 한 장면


모차르트가 작곡한 '돈 조반니'의 <La ci darem la mano>의 듀엣곡은 그날 내 가슴 깊이 큰 울림을 남겼다. 돈 조반니가 체를리나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남녀가 아름다운 몸짓과 목소리로 공연했다. 이후 어떤 가수가 어떤 공연을 벌이더라도 아름답지 않은 무대가 없었다. 오페라의 매력이 이것이구나, 그 자체의 감동과 울림이 나와 혼연일체가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그날 빈에서 스마트폰 카메라에 남겼던 팸플릿을 보며 유튜브에서 하나씩 되찾았다. 그리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클래식에 관한 몇 가지 책을 구입해 읽었다. 막무가내로 공연만 보기에는, 암기하기도 힘들었고 단순히 아리아를 부르는 가수의 가창력 만으로 감동을 기억하기에는, 내 소양이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에서 읽은 오페라 아리아를 발췌해서 유튜브에 라이브러리로 저장했다. 처음엔 55곡이었는데 몇 번 들으면서 전주만 들어도 다음 곡으로 넘겨버리고 싶은 몇 곡을 지웠다. 그래서 50곡의 오페라 아리아를 선별해 지금까지 1년 2개월 동안 듣고 있다.


계속 들어야 부분마다 감상 포인트가 달라진다. 마치 와인 같다.
산소에 노출되는 시간과 온도에 따라 산도와 텁텁함이 달라지듯이, 오페라 아리아는 들을수록 공기에 산화되는 와인 같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에 나오는 <Largo al factotum della citta>와 <Una voce poco fa>를 사랑한다.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에 나오는 <Com gentil> 에 매혹 당했고, 벨리니의 '노르마' 속 <Guerra, Guerra>에 죽고 못 산다. 푸치니 '라 보엠'에서 미미가 부르는 <Si mi chiamano Mini>에는 나의 풋풋했던 사랑이 떠오른다. '나비 부인'에서 초초와 핀 커튼이 부르는 <Dolcenotte! quante stelle!>는 심연의 감동이 무엇인지 눈을 감게 만든다. 샤를 구노의 '파우스트'는 흡사 마술피리의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처럼 들리는 <Ah! Je ris de me voir si belle>를 통해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진수를 보여준다.


바그너 '탄호이저' 속 <Auch ich darf mich so>는 오페라가 어떤 언어로 불리더라도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페라 아리아의 본질은 카타르시스와 Resonance라는 생각이 든다. 오페라 아리아를 듣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제대로 감상한 뒤에도 다시 듣지 않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나는 오페라 아리아를 제대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감상하게 된 뒤, 인내를 배웠다.


사람이 만든 소리가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는 진리를 알았고, 그 진리 속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을 위한 어떤 약이나 치료법보다도 훌륭한 치유를 안긴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나는 음률, 전율하는 기교의 소프라노 음성, 묵직하고 비통한 사랑의 울음을 표현하는 남성의 비토, 간교한 계책을 부리는 남녀의 간드러진 속삭임.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사람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관객은 아리아를 듣는 동안, 자신이 생애 동안 가져봤던 모든 감정을 끄집어내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해 인내하는 기술을 배운다.


애절함을 억누르고, 분노를 삭여 공기 중으로 흩어버리고, 공기보다 가벼운 흥분을 콧 끝에서 맺어내는 능력을 갖게 되고, 그 능력은 나로 하여금 인성의 담금질에 영구적인 풍무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나는 오페라를 듣는 이 순간에도 인내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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