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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Sep 21. 2019

아옌데를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

[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를 읽고]

전통적 혁명 방식은 더 이상 주권이 주체인 민중이 권력에 의하여 사회 참여가 짓밟혀질 때, 민중이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정신을 가장 민주적으로 실천한 사람을 꼽으라 하면 아옌데를 들 수 있다.

무자비한 독재정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의 권리마저 침해하는 곳에서만 게릴라 운동이 발생한다.




모든 혁명은 반혁명을 부르며, 반혁명은 종종 외세를 등에 업고 벌어진다, 라고 마르크스가 말했다.

아옌데를 두고 개량주의자 혹은 중도 사회주의자라는 등으로 폄하하거나 혹은 미제국주의 글로벌 기업들의 잔푼에 놀아난 피노체트 따위에게 한 줌 저항할 힘도 갖지 못한 무능한 정국 대통령으로 여기기도 한다. 나 역시 아옌데에 대한 평가에서 이 부분에 대한 의구심이 적지 않았다.

피델 카스트로, 레닌, 체 게바라와 같은 급진적이고 전통적인 혁명 수단을 실행하지 못한데는, 아옌데가 천성적으로 부르주아의 피를 받고 흘려서이고, 그 피가 함께 흘렀던 칠레 부르주아 정치인들 가문과 어려서부터 지낸 호혜와, 32살에 인민전선의 사회주의 정부에서 보건부 장관 등을 지냈던 출세가도가, 큰 역할을 했고, 이는 아옌데의 색깔을 북부 유럽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식민지 백인 가문의 덕후로 만들어 흐려놓았다 생각했다. 혁명을 겉멋으로 배웠다, 라는 게 나의 선입견이었다.

1970년 10월 24일 인민연합 정권으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아옌데와 인민연합을 두고 공산단 지도자 루이스 코르발란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인민연합은 수도 산티아고에서 푸에르토몬트로 향하는 기차와 같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승객들은 정류장마다 하차하게 될 것이다.



칠레의 사회주의는 스페인 왕정과 식민지 정책에 반기를 든 해방 민족이 전세계에서 거쳐왔듯이,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항쟁의 수단으로 프롤레타이야 혁명과 독재를 꿈꾸었다. 그래서 이 같은 움직임은 민주주의의 참여를 제약하는 독재정권이 있던 러시아, 중국 등에서 반제국주의와 인간평등의 구현을 위해 혁명이 발발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이 책은 통해 본 아옌데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목적을 같이 했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는 생각이 달랐다.

프롤레타리라 독재 기간을 거쳐 만인이 평등한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인간 사회의 완성으로 보았던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과 달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의하여 유지되어야 한다는 지향성이 아옌데에게 더 큰 지향성이라고 보인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야 혁명도 독재의 목적성인 영구성을 위해서라도, 전통적 폭력수단이 아닌 선거와 통합에 의한 민주적 동맹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나는 평소 이 부분이 아옌데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칠레를 30여 년간 군부독재와 경제 빈곤으로 이끌고 간 착각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물론 저자가 독자에게 이같이 강요하거나 직접적으로 주장한 적은 없다, 단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난 느꼈다.

아옌데는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영구적 사회주의 체제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영구적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느낀 듯하다.

그래서인지 아옌데는 평생 동안 개량주의자라는 비아냥을 듣거나, 혁명 좌파들과 노는 모습이 전통적 혁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을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받았다. 하지만 아옌데는 평생 동안 쿠바, 소련, 베트남과 같은 공공보건, 무상교육, 자원의 국유화를 통한 인민의 평등한 삶을 위해서는 단기 독재 방식을 지양했다. 그래서는 그는 평생 동안 선거와 민주주의 만을 사회주의 칠레의 미래라고 보았다.

그래서 1970년 10월 24일 대통령이 되고, 1973년 9월 11일 대통령궁에서 소총 자살을 할 때까지도, 권력을 통한 혁명 정책의 전개보다 합의와 통합을 통한 영구적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공공연히 CIA 공작에 놀아난 군부 쿠데타를 선동하는 언론이나 정치세력에 대해서도 일체의 통제나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또 다른 쿠데타와 반혁명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던 수구 부르주아의 반혁명이던, 전통적 폭력수단을 통한 혁명은 단기 성과를 일구기 마련이다. 피노체트가 선두에 선 군부 쿠데타 세력은 CIA와 미국 글로벌 자원개발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전군을 장악하고 대통령에 폭격을 가하며 아옌데를 시체로 끌어내린다. 이 과정의 아쉬움이 반혁명에 혁명으로 제압하지 못한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칠레 아옌데는 온건 혁명파의 전형적 실패 사례로 폄하되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억압받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정권의 독재는 또 다른 반혁명에 의하여 파괴되고 도살되는 모습을 1990년대 이후 인류는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옌데를 떠올리게 되었다.

1973년 불과 2년 남짓의 아옌데 인민연합정부는 무참히 짓밟혔고, 당시 패인으로 손꼽혔던 합의와 통합 정신이 진정한 사회주의 실현의 정당한 수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독재 없는 프롤레타리아 정권이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세상은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억압한 자들은 인민의 참여를 막는 극우, 친미 독재 정권들이었다는 사실에서 반추할 수 있다.

아옌데, 칠레 국민,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대의식이 성숙하지 못했던 1970년대에는 아옌데가 이상주의자로 지목될지 모르지만 어느 시대의 혁명가들이라도 이상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반드시 독재를 통해 정권을 유지시켜야만 성공한 혁명가가 아니다. 자살로 끝내고 친미 군부 독재정권에 죽임을 당했지만, 칠레식 사회주의는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아옌데 정신은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 의식보다 찬란히 빛난다.

프롤레타리야 혁명의 구호 아래 스스로 부르주아가 된 소련, 자본주의 자유경제체제의 수호에만 혈안 되어 인류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미국의 위정자들 앞에 아옌데는 과거 유럽의 어느 사상적 선각자들보다 추앙받을 존재라고 여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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