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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Sep 21. 2019

열등감 속 카잔차키스에게 조선은 없었다

[일본ㆍ중국 기행]을 읽고

1935년 인도양, 싱가폴, 중국 연안, 일본, 중국을 거친 기행문을 마치 중국과 일본의 문화탐방 보고서처럼 적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책을 읽었다.

문학적으로나 사서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존경스러울 부분은 없다. 단지 1935년이라는 불과 80여 년 전의 세상에서, 힘없는 약소국 그리스의 나약한 지식인인 카잔차키스가 유럽인으로 대접받고 싶었던 선민의식으로
ㆍ각 인종들의 타인종에 시선과 선입견
ㆍ인종들마다의 경멸, 공포와 숨은 경외심
ㆍ당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동북아시아 상황을 유럽인의 눈으로 그려내었다.

이것뿐이라면 카잔차키스 같은 망국적이며 허황된 자존심의 아웃사이더 글이 재미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독자는 글의 내면에서 터키에도 패전하며 수천 년 동안 이민족 지배 속에 살아왔던 그리스인의 과거 전성기에 대한 노스탤지어와 반대로의 자괴감을 보았다. 그리고 유럽인이라는 자존심에 드러내어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카잔차키스는 동양 일본과 중국에서 그리스의 과거를 위안받고 미래를 참고받았을 것이라고 느꼈다. 이 책을 먼저 읽음으로 인해, 카잔차키스와의 첫 대면이 지질함이었다는 것이 쓰라린 내 선택의 실수였다. 그리스 조르바를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935년, 고베, 오사카, 나라, 교토, 가마쿠라, 도쿄를 거쳐서 일본의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과 그 속의 냉엄함과 군사ㆍ기계 대국의 야망을 그려내었다.
고베와 오사카의 공업화와 노동착취가 메이지 유신의 일본 신도 정신과 이어져 희생이라는 명목 하에, 시부이(화려하지 않으면서 차분한 멋스러움)를 강요당하며 조상신과 천황을 위하여 일생을 다 바치게 살아간다. 야마토 다마시(일본 대화혼)는 가정, 조국, 천황을 위한 희생으로 강요받는데 이는 대동아제국 건설을 통한 아시아의 해방 주의로 무장되고 전쟁의 야욕이 숨어져 있었다.


태초부터 아마테라스(일본 조상신ㆍ태양의 여신)에서 조상신이 토속신이지만, 불교나 기독교 등의 해외 문물을 잘 흡수하고 동화시켜 일본인만의 문화로 재생산하는 그들에게서 '여성성을 가진 신의 나라'일본을 찬양하게 되고, 카잔차키스는 고대 그리스의 절정기 모습을 당대 일본에서 보고 자기 민족의 노스탤지어를 만끽하면서 일본을 통해 망국의 그리스의 미래를 위로받으면서 억지 자긍심을 가져보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리스나 유럽인들에게는 일본인의 후도신(굳센 일본인들의 마음 자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카잔차키스의 심각한 착각이다.


카잔차키스는 신도의 일본을 전성기의 고대 그리스로 데자뷔를 만들고 싶어 했다. 여신과 여성적 문화의 공통성을 쥐어짜면서, 그리스도 일본처럼 될 수 있고, 기독교가 아닌 종교를 가져도 유럽처럼 될 수 있다는 판타지이자 그리스가 가야 할 미래를 느낀 듯이 황홀해한다. 알파벳과 기독교가 없는 유일한 열강에서, 그리스의 자존감을 만들려 한 것이다. 그리고 신도의 희생과 조국애를 그리스에 도입하고 이를 위한 계몽 사상적 도구로 현세에 헌신과 내세로의 신격화를 추앙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을 떠나 중국을 향해 가면서, 당대 시대상이 그렇겠었지만 동양인에 대한 역겨움은 동양인이 만들었다는 분노를 없앨 수가 없다. 당시 일본은 열강으로서 공사관이 아닌 대사관을 파견한 나라로 러시아와 비교당하는 비서구 열강 중의 하나이기에,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에 대한 정보나 선입관은 동아시아의 창구인 일본을 통하여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일본은 벚꽃, 기모노, 게이샤와 귀족문화가 일상화된 노스탤지어인 반면에, 중국은 더러운 노란둥이들이 무슨 음식이던 처먹고 똥오줌이 지천에 깔린 음흉한 족속들의 땅이다. 그저 봐줄 만한 것은 그의 조국이 신의 나라이고 과거 유럽 문화의 모태였듯이 중국 또한 그러했다는 고전문화에 대한 존경 정도이다. 이마저도 불교적 정신문화인 공, 무, 해탈의 예술문화에 한하여 보일 뿐이다. 그저 글로는 '흙속의 진주, 중국이야말로 인류의 미래 모습이다'라고 할 뿐, 전반적 경멸감은 읽는 동양인들만이 느낄 수 있다고 본다. 독자의 생각에는, 그 자신이 패망국이자 반식민지 신민으로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본 적도 없는 2천 년 이전의 고대 문화에 대한 자괴적 자존심을 중국에서 또 한 번 보았기 때문에 이를 피하고 보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러운 오물 냄새, 지린내, 땀냄새, 구역질 나는 먼지로 숨 쉴 수 없는 중국이라는 땅에서 5억 명이나 되는 노란둥이들이 개미떼처럼 사는 것이 역겨웠음을 덤덤히 그린다.

당대 중국은 하나의 국가도 아니고 국가적 대립도 아닌 국민당, 공산당, 각종 토후 세력들이 설치던 무주공산의 도적떼 활개 지역이라는 것이 일본의 대외적 시선이었다. 그래서 만주사변을 일으켜 정통 국가란 것을 만들어 중국에는 없는 국가란 프레임 싸움을 하려 한 것이다. 2년 후 발생한 중ㆍ일전쟁은 일본은 토벌작전 정도로 부른 것도 당시 중국의 이러한 사정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중국을 보면서 여유로운 입지의 영국, 미국인도 아닌 변방의 노예 국가 신민인 카잔차키스가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자괴감이 들었을까 여러분들도 상상을 한번 해 본다면 재미있을 것이다. 베이징 궁궐과 거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황량한 크레타를 바라보는 듯 겹치게 느껴진다.

중국인은 현세의 살아있는 사람과 교류하는 조상신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통한 복수를 진심으로 여긴다고 보았다. 이러한 문화는 그가 존경하는 일본 신도 사상과 동일하지만, 그가 보는 중국인은 물신스럽고 천박하게도 여기서도 거래관계로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도 도움이 되지 않으면 복수하거나 속이는 것이 중국인인데, 사람 속이는 것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천박한 민족성을 깔보고 있다. 이는 독자도 약간은 동의하지만, 이는 수천 년의 강대국이지만 다민족 시스템에서 정복당하고 정복해온 역사 속 생존 이력이 만들어낸 것일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도 가장 기만적이고 가장 배신을 자주 하는 유비가 성군이자 현인으로 추앙받는 것이 중국 아닌가!

더욱이 유럽인 기준에서는 사람 취급도 받을 수 없는 것이 불공정이고 기사도 정신에 어긋나는 중국인 습성을 담담히 거친 표현 없이 쓴 부분이 중국 장님에 대한 에피소드이다.

 카잔차키스는 중국에 살고 있는 유럽인 교수의 말을 빌어서, '중국인들은 고마움을 모른다. 장님을 수술로 눈뜨게 해 줘도 구걸해서 먹고살 수 없게 만들었다고 원망한다'라고 민족성을 반인륜적으로 소개한다. 더욱이 일본의 공창과 반인륜적 성매매 문화는 존경하고서, 중국의 여성은 싸잡아 사회를 좀먹는 키르케로 비유한다. 그의 짧디 짧은 합리성은 민족적 절망 주의에서 나온 반항적 탈피라고 또 한 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러한 중국 민족성은 야비한 권모술수와 결합하여 중국인들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척한다'라고 여기기에, '5억의 중국인들이 언젠가 기계식 군사력으로 무장하는 그날이 오면 백인들은 단 한 명도 중국에서 퇴항도 못하고 도살당할 것이다'면서 그 잔악함과 간교함을 경계하는데, 일본인들의 대중국 비하 사상이 상당분 세뇌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카잔차키스는 싱가폴에 들어서 아시아의 중국식 민낯을 맞닥이면서, 아시아의 2대 악을 '여성'과 ' '아편'이라고 하였다. 지극히 유럽적 백인우월주의와 역사 망각이다. 아편은 1840년대 유럽인들이 중국 내 반식민지 착취 사업으로 범중화권으로 퍼뜨리고 쟁취한 착취 시스템임에도 이를 아시아적 병폐라 함은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아 역사를 부정하고 망각하는 행위이며, 현재 일본이 자행하는 자기부정이 이미 80여 년 전 유럽인들이 아시아인들에게 적용한 방식임을 알게 되었다.


유럽은 히브리 지역의 토착종교들이 그러하듯이 기독교 문화의 육신에 대한 절제 의식으로 인하여 여성상품에 대한 대대적 쾌락추구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슬람 하렘이나 일본의 요시와라와 다마노이에 대한 경외심을 현실에서 소원 풀이해 보는 것이 평생의 숙원사업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아시아의 일본과 중국식 여성상품화를 '병폐'라는 이름으로 지목하는 위선을 보인 것이지만, 그들은 내면에는 판타지 그 자체로 동경해 왔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과 '우키요에'의 대유행을 통하여 통열히 비웃어줄 수 있다. 지극히 자기기만적 표출이며 경멸스러운 자가당착이다.

후일 카잔차키스는 공산화된 중공을 방문하면서 스스로가 어떤 비난을 감수했을까? 그리스 민족해방 책으로 공산주의와 불교에 심취하였던 그에게, 마지막 제국주의 해방 국가로 그를 받아준 중국을 보면서 스스로의 가벼움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았을까? 중국을 다녀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것도 한평생 선입견과 오인 속에 살아온데 대한 허탕함과 대문호이자 지식인으로의 자기 상실이 미친 영향이 아닐까?

하지만 더욱 비참한 것은 반식민지 착취 신민으로 지질한 삶을 살았던 하등 유럽인 카잔차키스에게도, '
아시아에는 조선과 한국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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