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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Sep 21. 2019

앵그르와 샤넬의 영원한 샘

[미술 명화, 창작과 패러디]

육칠 년 전인가,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에 one-day tour를 끊었다. 제발 내버려  달라는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고 비행기를 태웠다. 정말 젊은 아빠의 기억을 남겨 주고 싶어서였다.

운 좋게도 우리 부자 외에는 아무도 그 날 신청한 사람이 없어서 개인 레슨 받듯이 두 미술관의 명화들을 넉넉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명화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서 다들 비슷해 보이고 다들 비슷한 그림을 따라 그린 것 같아, 영혼의 탐닉보다 걸어 다니는 육신의 고통이 더 다가왔다.

오르셰 미술관 왼편 복도 벽에 전시된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서 아들아이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가이드도 아들에게 어깨를 안으로 당기며 말했다. "예술작품이긴 한데 좀 더 커서 감상해도 될 것 같아요."

가이드와의 긴 대장정을 끝낸 뒤 아직도 기억나는 파리의 대중적인 홍합 스튜 Bistro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다들 벌거벗겨 놓은 거야?"

아내는 침착하게, 고대 신화와 기독교 종교 속의 인물들을 순수하고 숭고하게 보이도록 완벽한 인체를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고 차분히 설명해 줬다. 신을 닮은 인간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야만 신의 진리, 이데아를 그린다고 생각했다, 라고도 덧붙였다. 신플라톤주의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자 아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작심한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다들 잠지에 털이 없어? 신은 거기에 털이 없어?"
우리 부부는 홍합을 찌른 포크가 거의 입 앞까지 와 있음에도 순간 삼키지 못했다. 시간의 림프가 일시 중단 버튼이라도 누른 듯 우리 부부의 몸짓이 일시에 얼음장으로 굳었다.


어? 그러고 보니 다들 거기에 털이 없네.


미술 공부를 하면서 털 없는 여인들의 명화를 볼 때마다 아들의 그 질문이 떠올라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보고 질문했던 물음이 아들의 것과 같았다. 그때는 아들의 물음에 당황함을 연이어 큰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려 끝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로, 샘, 1820~1856, 캔버스 유채, 오르세

아름다움 여인을 무모증 환자로 만든 가장 대표적 작품으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샘>이 떠오른다.

아름다운 누드에 가까운 나신이다. 이전까지의 나신을 보면 정말 숭고하게 벗은 몸이다. 그래서 현실 세계의 발가벗은 여자 몸과 달리, 심한 포샵을 한 듯한, 매끄러운 몸매와 살결로 그려졌다.

앵그르를 필두로 한 신고전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화가들은 여성의 나체를 실제 애인이나 옆집 여자들의 벗은 몸처럼 굴곡과 몸의 요충을 그대로 표현했다. 지금 우리가 봤을 때는 이 정도는? 하고 느끼지만, 당대 귀족들에게 겨느랑이에 접히는 살, 요철이 뚜렷한 무릎 부위, 음모만 없을 뿐 성기가 보일 듯한 아랫도리 등은 충격적이다 못해 파렴치해 보였다.

이 작품을 앵그르는 1820년부터 36년간 그렸다. 심혈을 기울이며 그리는 동안 19세기는 앵그르가 그 만의 화풍을 고정적으로 유지하기엔 너무나 세태가 빠르게 변해갔다. 36년이란 세월이 지난 동안 앵그르가 초반에 기획했던 기획 의도와는 살짝 비켜갔을 수도 있다. 더욱이 앵그르의 제자인 폴 발즈와 알렉상드르 데 코프가 손을 댓을 가능성도 매우 높아 기획자의 의도와 대담성은 잠시 상상에 맡기는 게 어떨까 싶다.

그림 속 여인은 림프 에코다. 에코는 평소 하두 말이 많아 재잘대는 바람에 헤라에게 벌을 받아 남이 먼저 말을 한 뒤에나 대답할 수 있게 됐다. 어느 날 사냥 나온 나르키소스를 본 에코는 그에게 반해 말을 걸고 싶었지만 헤라의 저주로 인해 속만 태웠다. 그런데 나르키소스가 함께 온 사냥 패들과 길이 엇갈려 이들을 애타게 찾았다. "거기 누구 없소?"

드디어 에코가 대답했다. "없소?"
"나와서 합류하자!"라고 나르키소스가 외치자 숨어 있던 에코가 드디어 숨을 고른 뒤 뛰쳐나와 나르키소스의 목덜미를 사랑스럽게 감으려 했다. 하지만 기겁을 한 나르키소스가 물러서며 소리쳤다.
"손 치워! 어림도 없어. 너 같은 것이 뭐, 안아 주세요?", "안아 주세요?"

절망한 에코는 그때부터 동굴이나 깊은 산속에 숨어 뼈와 살이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숨기고 슬퍼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코의 이야기는 잘 알겠는데 이 그림과 무슨 관계일까? 에코의 오른발 옆의 수선화를 보고 이제부턴 우수한 우등생이 읊는 생물 공식처럼 잘 기억해야 한다. 수선화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여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가 있던 자리에 다시 피어난 꽃이다. 그래서 수선화는 나르키소스의 환생을 상징한다. 따라서 완벽한 몸매를 지닌 에코와 수선화를 함께 두어서 나르키소스에 대한 에코의 사랑을 남겼다.

그렇다면 에코가 어깨에 맨 항아리는 왜 그린 것일까? 그리고 그림의 제목이 왜 <샘>일까? 샘이 바닥이나 돌벽에 있는 건가? 의구심이 든다. 결론적으로 샘이라는 제목은 잘못된 번역이다. 원제가 La Source인데 의미 상으로 본다면 수원(水原) 정도로 하는 것이 맞다. 딱 귀에 들어오는 단어가 없는 듯하다.

다시 말해 에코가 어깨에 맨 항아리는 전영택 작가의 화수분이다. 영원히 마를 새 없이 계속해서 물을 흘러내리는 화수분 항아리다. 항아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흐르고 구름으로 올라 비를 내리고 우리 대지를 양육한다.


육칠 년 전인가,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셰 미술관에 one-day tour를 끊었다. 제발 내버려  달라는 아들의 어깨를 끌어안고 비행기를 태웠다. 정말 젊은 아빠의 기억을 남겨 주고 싶어서였다.

운 좋게도 우리 부자 외에는 아무도 그 날 신청한 사람이 없어서 개인 레슨 받듯이 두 미술관의 명화들을 넉넉히 감상할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명화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서 다들 비슷해 보이고 다들 비슷한 그림을 따라 그린 것 같아, 영혼의 탐닉보다 걸어 다니는 육신의 고통이 더 다가왔다.

오르셰 미술관 왼편 복도 벽에 전시된 구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에서 아들아이가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가이드도 아들에게 어깨를 안으로 당기며 말했다. "예술작품이긴 한데 좀 더 커서 감상해도 될 것 같아요."

가이드와의 긴 대장정을 끝낸 뒤 아직도 기억나는 파리의 대중적인 홍합 스튜 Bistro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다들 벌거벗겨 놓은 거야?"

아내는 침착하게, 고대 신화와 기독교 종교 속의 인물들을 순수하고 숭고하게 보이도록 완벽한 인체를 그리는 방법을 택했다고 차분히 설명해 줬다. 신을 닮은 인간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야만 신의 진리, 이데아를 그린다고 생각했다, 라고도 덧붙였다. 신플라톤주의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자 아들이 잠시 머뭇거리다 작심한 듯 다시 물었다.
"그럼 왜 다들 잠지에 털이 없어? 신은 거기에 털이 없어?"
우리 부부는 홍합을 찌른 포크가 거의 입 앞까지 와 있음에도 순간 삼키지 못했다. 시간의 림프가 일시 중단 버튼이라도 누른 듯 우리 부부의 몸짓이 일시에 얼음장으로 굳었다.


어? 그러고 보니 다들 거기에 털이 없네.


미술 공부를 하면서 털 없는 여인들의 명화를 볼 때마다 아들의 그 질문이 떠올라 빙그레 입꼬리가 올라간다.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가장 먼저 찾아보고 질문했던 물음이 아들의 것과 같았다. 그때는 아들의 물음에 당황함을 연이어 큰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려 끝냈다.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사랑이 영원히 영원히 이 세상을 적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앵그르의 기획 의도이다.


위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림을 훤하게 이해하고 나면, 샤넬의 코코 향수 광고를 이해할 수 있다.

샤넬 향수 코코를 흘러내리는 모델의 포즈가 샘의 에코와 흡사하다. 허리를 틀고 다리를 모아 붙인 것은 에코가 현대 모델의 요염함을 오히려 따라한 게 아닐까 착각들 정도로 동일하다. 다만 에코는 벗었지만 광고로 나온 모델은 전신을 검은 드레스로 가렸다. 그리고 항아리 대신 거대한 코코 향수병을 어깨에 맨 채 마구 마구 향수를 흘러내린다.

광고 지면의 하단에 쉽고 간단한 불어가 적혀 있다. '코코, 샤넬의 정신'

기가 막히게 패러디했다. 존경을 떠나 광고 기획자에게 경외심마저 들 정도다. 고급스럽고도 고전적인 럭셔리가 품위 있게 샤넬의 이름을 숭앙해 준다.


사랑이라는 관념을 의인화했던 <샘>처럼,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샤넬 그 자체를 의인화했다.


코코 샤넬에게 검정색은 샤넬의  색이다. 검은 정장, 치마, 가방, 그리고 모자. 검정색은 샤넬이다.

그래서 광고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모델은 의인화된 샤넬이다.


이렇게 의인화된 샤넬이 코코 향수를 샤넬의 정신이라고 소리 없이 부르짖으며, 샤넬의 정신을 흘려 내린다. 에코가 화수분의 항아리에서 세상의 물을 흘려 내리듯이.

코코 향수가 샤넬의 정신이 되어 온 세상에 샤넬의 정신을 퍼뜨리고 이 세상의 만물과 함께 할 것이라는 철학적 표현을 위해 패러디 기법을 활용했다.

프랑스가 낳은 명화와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패션 리더의 정신이 하나 된 액체가 되어 이 세상을 적시고 양분을 주어 미래를 키워나가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힌다.

저절로 고개를 숙연히 내리고 말없이 그들의 마음에 경의를 표하는 인사말을 속으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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