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의 한 호텔. 6층 난간의 맨 앞에 만삭의 미소녀 같은 여인이 위험스럽게 섰다. 1월의 차가운 겨울 칼바람이 배 부른 그녀의 앙상한 다리 사이로 마수를 뻗는다. 퉁퉁 부은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멈출 줄 모른다. 파리 시내를 좌에서 우로 흝어본다. 눈물이 망막을 가려 돋보기처럼 파리의 곳곳이 크게 들어왔다. 그리고 더 큰 울음과 함께 파리의 회색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임신 9개월의 뱃속 아이와 함께 철퍼덕 소리를 내며 온 몸의 뼈와 살이 부서지고 터져 나갔다. 1920년 1월 25일 새벽, 모딜리아니의 아내 잔 에뷔테른이 투신자살했다.
잔 에뷔테른, 자화상, 1916~1917, 종이에 유채, 제네바 프티 팔레 미술관
1898년 4월 6일, 부유한 프랑스 명문가에서 태어난 잔 에뷔테른이 겨우 22살이 되기 3개월 전 꽃다운 나이에 딸아이를 남겨두고 뱃속 아이를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모델이 되어드릴게요."
모딜리아니의 미망인이 아닌 동반자가 되기 위하여,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연인'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그녀의 극단적인 죽음에 앞서 더 비극적인 사건은 바로 전날 1920년 1월 24일, 남편 모딜리아니가 결핵성 뇌막염으로 파리 자선병원에서 35살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잔 에뷔테른과 동거 후 결혼 생활을 하면서 고질적인 가난과 병치레로 힘든 나날을 보냈다. 모딜리아니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잔 에뷔테른은 베개 밑에 면도칼을 두고 잠들었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는 날, 미련 없이 그를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모딜리아니의 싸늘한 주검에 입맞춤하며 떨어지지 않은 그녀는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끝내 여관방의 난간에서 뛰어내려 22살이 채 되지 않던 일생을 끝냈다. 모딜리아니를 저주했던 잔 에뷔테른 집안에서는 두 사람의 시공간을 초월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합장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지인들이 끈질기게 애원한 끝에 죽은 지 10년이 지나서야, 페르 라세르 묘지에서 영원한 사랑을 실천한 불멸의 연인들이 합장될 수 있었다.
잔 에뷔테른, 자살, 1920년 종이에 수채, 개인 소장
남편 모딜리아니 못지않게 드로잉과 붓터치가 강렬했던 여류 화가 잔 에뷔테른이 죽기 직전 남긴 유작이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사실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거취도 미련 없이 확정한 듯한 내면을 보여준다. 1920년 1월 25일의 투신자살이 남편을 잃은 데 대한 충동적 투신이 아니라, 계획적 자살이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유대계 이탈리아인인 모딜리아니는 어려서 늑막염, 장티푸스, 폐렴 등에 이어 16살에 당시로서는 사형선고와도 같은 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모딜리아니는 살아났고 이로 인해 그는 스스로를 '불멸의 부활자'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우매한 자기 확신으로 인해 파리에서 마약, 술, 담배, 코카인에 절어 지냈는데,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 오판했다. 그래서 더더욱 생활은 방탕해졌고 가정 경제는 더욱 파탄 났다.
미성년이던 잔 에뷔테른을 임신시켜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결코 부활할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렇게 죽음을 기정 사실화하면서 자신의 데스마스크 같이 초췌한, 하지만 화가로서의 자존감만은 가로 새긴 그의 자화상을 아내 잔에게 남겼다.
모딜리아니, 자화상, 1919, 캔버스에 유화, 상파울루 대학 현대미술관
죽음을 가지고 놀면서 서로의 이별이 아닌 영원한 불멸을 보여준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초겨울 삭막한 하늘을 애처롭게 바라보게 한다. 한겨울 고열 속에 죽어간 모딜리아니와 차가운 그의 시신에 체온을 맞추고 겨울 칼바람에 몸을 내던진 잔 에뷔테른의 이야기. 모딜리아니라는 유명 화가의 이름보다 잔 에뷔테른을 먼저 기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