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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가 아니면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할 수 없었다.

하드코어 게이 코드의 이유

by 아메바 라이팅
장 폴 고티에, 이브 생로랑, 돌체 앤 가바나, 크리스찬 디올, 칼 라거펠드, 조르지오 아르마니, 톰 포드, 마크 제이콥스,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맥퀸은 모두 동성애자 게이였다.



이들의 성적 취향이 선천적 혹은 유아적 환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즉 패션 디자이너로서 활동하기 이전에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사회관계적 필요에 의해 변형된, 즉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한 이후에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이들이 확률적으로 보편적 범례에 속한다고 여겼다면, 후자와 같이 다소 모욕적일 수 있는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로 성공하기 위해 동성애를 성정체성의 범주에 추가했다, 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


샤넬이 디자이너로서 성공해 가는 데 있어서, 남성들이 끼친 영향과 경제적 지원이 너무나도 지대했다는 사실에서 의구심이 비롯된다.


사넬과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클럽에서 코코샤넬이라 업신 당하던 가브리엘 샤넬은 프랑스의 나이 많은 부르주아 에티엔 발장의 정부로 되는데, 이로 인해 상류 귀족과 부르주아 사교계에 입성하게 된다. 그들의 생활상을 받아들이다 자기를 위해 만든 모자가 상류층 여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샤넬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이후 발장이 소개해준 영국인 사업가 카펠과 바람이 나고, 카펠의 경제적 후원으로 샤넬 모드를 파리 캉방에 설립한다. 카펠이 교통사고로 갑자스런 죽음을 맞자, 샤넬이 식음을 전폐하며 칩거하다 다시 향수 사업에 집중하는데...


아이러니한 사실은 샤넬에게 5번 향수 샘플을 선사한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해준 사람이 러시아 대공 드미트리 파블로비치였는데, 그와도 깊은 애정 행각으로 불륜을 저지른다.


그리고 영국 처칠 수상과의 친분을 통해 알게 된 웨스트민스트 공작과도 연애하다, 공작으로부터 청혼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프랑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도 아슬아슬한 경계를 즐겼다. 샤넬 스스로도 말했다.


내 인생에서 남자들이 없었다면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든다.



샤넬에게 남자란, 성적 유희와 안식처였고, 새로운 삶의 자극제였고, 디자이너로서의 경제적ㆍ사회적 후원자였다. 이 가운데 객관적으로 샤넬이 디자이너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데에는 세 번째 영향이 지대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샤넬은 2차 세계대전 중 파리를 점령한 나치 독일 장교, 한스 귄터 폰 뒹클라게와도 염문을 뿌리며 비시 정권 아래에서 디자이너로 명성을 이어갔다. 난 이 사실에서 샤넬에 있어 남성의 존재는 위의 세 번째 이유였다고 확신한다.


기성복 대량생산이 아닌 오뜨 꾸티르로 시장을 점유했던 당시 패션 시장은 매출 규모나 사업의 지속성이 떨어졌을 것이다. 지금의 LVMH, PPR, PRADA 그룹 등이 전 세계적으로 벌이는 럭셔리 브랜드 대전과는 거리가 멀다. 현재 브랜드 이름의 주인인 가문의 사람들이 절멸해 영국, 미국과 독일계 해외 디자이너들이 이들 럭셔리 브랜드의 기획과 경영을 도맡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샤넬에게 필요했던 최고의 투자는, 사회적 영향력을 끼치도록 가교나 울타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돈 많은 존재였다고 본다. 그래야만 샤넬의 남성 편력이 이해된다.


파리에 오뜨 꾸티르가 장악하던 시대에, 실제 가장 큰 손은 부르주아나 귀족 남성이었고, 이들은 가게 사장이나 점원들의 몸매나 미모를 확인한 뒤 소위 '가게털이'식 구입과 원나잇 스탠드를 맞교환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런 사서적 야담을 보더라도 샤넬의 행각이 이해된다.


이러한 남성을 젠더로의 구분이 아닌, 사회ㆍ경제적 위치의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동성 코드가 후천적 필요성에 의했을지도 모른다는데 부인만을 할 수는 없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메종이나 모드를 열었던 디자이너들에겐 자본적 후원자의 존재는 하늘의 유성 같았다.


하지만 패션 디자인이 가지는 창조의 감성과 노력, 시장의 고객 지향적 사고 등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이런 특징적 차별성만으로 치부하기에는 선천적으로 지향된 취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톰 포드가 감독한 영화 <싱글맨>의 콜린 퍼스


취향이란 선택 가능한 자의 강압적 성향이 아니라, 자아가 페르소나를 이겨내어 표출하는 반향에 가깝다. 따라서 동서고금으로, 프랑스인에서 미국인으로, 구시대 하층민 출신에서 신대륙의 히피에 이르기까지, 출신이 다양해진 패션 디자이너들의 동성애 코드는,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적 특성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또한 프레타 포르테를 지향하며 대중화와 자본적 대량생산에 몰입하면서, 럭셔리 브랜드들이 동성애 코드를 아예 하드코어화시켰다.

이브생로랑 vs 돌체앤가바나 광고


향수를 피부가 입는 옷으로 생각한 이브생로랑의 향수 광고와 돌체앤가바나가 자주 애용했던 남성 모델 중심의 동성애는 극히 하드코어적이다. 단순히 디자이너가 게이라서 광고도 그렇다는 식의 연계 의식은 유치한 발상이다.


남성과 여성에 대한 젠더 구분보다 인간의 신체에 걸맞은 의상을 창작의 대상으로 하여, 날것 그대로의 감성을 표출하는데 동성 코드가 이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 몸, 자아, 를 그대로 인식해 그의 우아함과 힙함을 입히려는 디자이너의 상업적 욕망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패션 디자인이란, 정말 아무나 해서는 안될 감성 부족민들의 영역이구나, 라고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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