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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코코 샤넬의 추잡한 민낯

샤넬이 살아 코코를 구원했다

by 아메바 라이팅

1971년 1월 10일. 발렌시아가를 비롯한 당대의 내로라하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스위스 로잔의 한 묘지 앞에 모였다. 애도와 경멸이 한데 어울린 공기가 묘지의 차가운 흙 위를 짓눌렀다. 배신의 곰팡이 내음이 조문객들의 폐를 채웠고, 이내 다시 조롱의 습기와 버무려져 죽은 이의 시신을 둘러 샀다.


여성 패션 코드 샤넬을 만든,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의 장례였다.



샤넬은 파멸과 배신의 화신이다. 처음엔 주변의 권세 꽤나 누리던 남자들 파멸시켰고, 샤넬 모드로 성공한 뒤에는 노동자들을 핍박했고, 이후에는 조국 프랑스를 배반했다. 인류의 가치관은 저급하고 부정했다. 팜므파탈이란 단어가 아까운 인간 말종이었다.


남자들을 유혹하고 몸을 팔아 자신의 욕망과 권세를 얻었던 프랑스식 데미몽뎅이었다. 상류층의 사교계를 흉내 내던 고급 창녀는 벨 에포크 시대의 뮤즈였는데, 그 명맥을 샤넬이 이었다.


에티엔 발장, 카펠,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웨스트민스터, 스트라빈스키 등에 이르기까지, 섹스 파트너, 정부, 원나잇 스탠드 상대로 두루 섭렵했다.


카펠의 사망 후 실의에 빠졌다고 했으면서도 드미트리 대공과 불륜을 즐겼고, 이로 인해 드미트리 대공으로부터 조향사를 소개받아 샤넬 No.5를 출시했다. 스트라빈스키 가족을 자신의 별장에 불러들여서는 스트라빈스키를 유혹했고, 나치에 점령된 비시 정부 때는 독일군 장교의 현지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걸려든 남자는 모두 일찍 죽거나 한 푼 없이 파산했다. 악의 꽃이었다.




1934년까지 모조 주얼리 사업, 샤넬 슈트, 액세서리 사업 등을 성공시키며, 샤넬 모드는 상근 노동자만 4천 명이 넘는 대기업이 되었다. 비참한 노동 환경과 폭정에 가까운 노동 강요로 인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는데, 이에 격분했던 샤넬이 아예 공장을 폐쇄하고 사업체를 접어버렸다. 프랑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철저히 무시했던 저급한 부르주아였다.


이때, 비루한 부르주아 권위의식에 빠졌던 샤넬은 노동자들에 대한 경멸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비하 의식이 강했다. 1933년 샤넬이 '유대인은 유럽의 쓰레기이고, 히틀러 같은 영웅만이 유대인을 척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공공연히 발언했다.


독일 괴뢰 정부인 비시 정부가 지배하던 시절에, 샤넬은 독일군 장교, 한스 군터 폰 뒹클라게의 연인이자 정부가 되어 호화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파리의 리츠 호텔 7층 스위트에서 독일군의 호위를 받으며 지냈는데, 이때 독일 첩보기관 '압베어'에 채용되어 스파이로 전향했다. 샤넬의 연인은 괴벨스에게 직보고할 정도로 최고위급의 독일 스파이 총책이었다고 하니, 샤넬이 또다시 고의적으로 유혹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독일 스파이 채용 업무를 담당했던 게슈타포 요원, 루이 드 보프를렁 남작을 만나 스파이로 활동했는데, 자신과 같은 변절자를 찾아 또 다른 스파이를 양성했다. 대다수의 파리 시민들이 레지스탕스가 되거나 이들을 지원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매국노가 되었다.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되고 드골 등 자유 프랑스 정부가 독일 부역자까지 처단하기 시작하자, 어이없게도 샤넬은 독일 장교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해 도피한다.


1954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는 뻔뻔스럽게도 또다시 리츠 호텔에서 기거하며 패션계에 컴백한다. 그리고 1930년대에 유행시켰던 소위 샤넬 코드를 그대로 이용했다.


프랑스에서는 매국 창녀라는 욕설로 샤넬을 비난했는데, 웬일인지 영국과 미국에서는 샤넬의 컴백쇼에 대해 <지난 50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이너>로 치켜세웠다. 소련의 동유럽 공산화에 대항해 마샬플랜으로 독일계의 유럽 내 입지 강화를 도모했던 미국의 니즈와 영국 처칠 수상 등과 샤넬이 가졌던 친분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죽을 때까지 프랑스 사람들에게 경멸받던 샤넬은, 반유대주의, 매국행위, 친나치주의자라는 이유로 프랑스 영토 안에서는 묻힐 수 없었다. 그래서 망명지였던 중립국 스위스에서 묻혔던 것이다.


샤넬의 인생과 사고방식은, 저급하고 부정했다. 또한 하는 짓마다 반성이나 자성이 없었다. 말 그대로 소시오패스였다. 남자는 시의적절하게 잘 고르고 찼으니, 사이코패스라고는 부를 수 없다.


이런 샤넬을 알고도 샤넬에 환호한다면, 인간으로서의 측은지심과 선의식이 과연 우리를 지배하는 게 맞는가, 라는 잔인한 의문에 봉착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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