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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Dec 10. 2019

매일 밤 무협 비디오로 잠 못 이뤘던 김우중 회장

내가 22살이던 그 시절, 내 인생을 바꾸었던 사람

아버지는 네가 너무 자랑스럽다.



우리 아버지는 일자무식에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영민한 두뇌가 눈에 띄는 사람이었지만, 평생 지방에서 하층민으로 살아온 아버지가 바라본 세상은 조그만 우물 안의 생태계 인양 편협하고 단순했다. 고작 대학 3학년 겨울학기에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처음으로 대기업 인턴쉽을 허락해 준 기회를 두고 크게 감동받은 듯했다.


나는 1994년 1월. 서울역 앞 대우빌딩 본사에서, 그것도 김우중 회장 비서실에서 인턴쉽을 했다. 시건방지게도 나 같은 우수한 학생이 대우그룹 같은 일반 기업에 나가 주는 것만으로도 기업이 내게 감사해야지, 라는 오만에 찼었다. 


대우 그룹 인사팀에서 인턴이지만, 신원조회를 위해 당시 호적등본 등을 요청했고 아마도 그때 부모님이 그 서류를 대우 본사 인사팀으로 우편송달을 했었나 보다. 아버지는 우편을 보내고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 아들이 대우그룹에, 서울 남대문구라고 적힌 대우 그룹 주소지로, 우편을 보내는 엘리트로 컸다고 자랑스러워했다.



내게는 가당치도 않은 가정이었지만, 필부의 가슴에는 뜨거운 피를 마하의 속도로 솟구치게 한 듯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와 상관없이,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든 김우중 회장을 만났다. 그렇게 솟구친 피는 나에게 용기와 꿈을 자극했고, 몇년 뒤 대담해진 실천력으로 벤처기업을 창업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샐러리맨의 우상이었고, 흔치 않은 창업 1세대 재벌이었으며, 동유럽을 개척 중이던 애국 전사였다. 그리고 비서실에 배정된 나는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비서실 직원들의 무용담에 고취되었다.



지하 비디오방에서 무협지 영화 중에, 시리즈 제일 긴 걸로 가져와.



비서실 A대리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장난치나? 싶어서 대답 대신 희멀건 미소를 그에게 띄웠다.



야~  뭐해. 회장님 오후 출국이야. 20편 넘는 걸로 아무거나 빨리 가져와.



장난이 아니구나  싶어서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비디오 샵 주인에게 천천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A대리에게 전화받았어요. 이번엔 이걸로 가져가세요.



제목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B급도 되지 못할 무협 액션 영화 시리즈였는데 아마도 지금 기억에 거의 27~28편 정도였다. 손으로 미는 작은 철 수레에 실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러다 십몇 층인가에서 기름기가 과도하게 흐르던 백발의 자동차 임원을 만났다.


회장님 건가 보네? 이번엔 뭐야?




인턴쉽을 처음 시작한 나만 모르는 회장님의 페르소나를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해외 출장 때마다 밤을 함께 지새워줄 김우중 회장의 페르소나가 비디오 테이프였다고 했다. 출장 가서 돌아오는 그날까지 매일 밤, 새벽을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무협 시리즈 비디오를 한 수레씩 가져갔다.


매달 돌아오는 그룹의 결제일, 계열사별로 밀려오는 급여일, 한창 호가를 높이던 대우자동차의 선급 결제 등으로 인해 단 하루도 쉬운 잠에 빠지지 못했다고 했다. 걱정과 공포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비디오 영화 시리즈를 이용해 생각의 엄습을 막아내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중요한 일을 김우중 회장을 위해 했다.



인턴을 두달 하다 끝내고 학위를 지속하던 어느 날. 그가 출장길에 자취를 감추었고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실없는 웃음을 날리며 달리던 대우 그룹 서울역 본사는 남의 손에 넘어갔다.


김우중 회장이 방금 영면에 들었다는 속보가 뉴스에 떠올랐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했던 희대의 사나이가 드디어 깊은 잠에 들었다.



내가 비디오 테이프 빌려오지 않아도 그동안 잘 주무셨나요?  
그리고 이제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잠이 강탈 당한 시간을 비디오로 죽이지 마세요.



야밤 늦게 괴로운 상상에 와인 1병을 비운 내가, 깊은 영면에 든 김우중 회장의 잠을 걱정한다.


내가 사업을 시작하고 힘들어 지칠 때마다, 김우중 회장의 비디오 시리즈를 떠올리며 위로 했다.


김우중 같은 재벌 회장도 돈 걱정에 비디오 보며 날밤 샜는데...나는 그 정도는 아니잖아?



이제 잘 주무세요. 그리고 나도 이제 깊이, 그리고 모든 걸 잊고, 잠 들고 싶습니다.


조용히 나의 거인이었던 과거의 김우중 회장을 소환해 위로한다. 고생하셨습니다. 푹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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