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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명작, <마음>에선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나쓰메 소세키, 불편하지만 질투난다

by 아메바 라이팅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합을 당한 지 겨우 4년이 지난 1914년. 아사히신문에 출간된 <마음>은 한기를 올리는 놀라움을 내게 안겨 주었다.


‘1914년에도 에고(Ego)에 대한 묘사와 비판이 이다지도 수준 높을 수 있구나, 현대적이다.’


근대화된 1900년대 초. 일본이 이룬 메이지 유신의 눈부신 결과물에 환호하면서, 한편으로는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우리 일본인들에게 이 정도는 별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근대 일본의 당대를 자부하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시대감각에 대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과 나, 부모님과 나, 라는 챕터를 통해 무작정 이유 없이 선생님에게 이끌리는, 1910년대를 살아가던, 대학생‘나’의 시선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든 것에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다소 느긋하기까지 한 일본의 20세기 물상주의를 보여주었다. 질투난다.


그에 반해 선생님의 과거가 새로운 ‘나’가 되어 ‘선생님과 유서’에서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1870년대는 부정적이며 피폐한 일본의 19세기 과거로 그려졌다. 당시 우리처럼.

가마쿠라에서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을 따르며 집까지 드나드는 신세를 지게 된 나에게서는, 러시아 소설의 안나 카레니나가 일본 남자 대학생으로 대체된 듯하다. 나는 다소 동성애적 시선을 느낀다. 아마도 여성을 주체화하기 곤란했던 당대의 일본 문화 잔재를 의식한 결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자주 드러나는 순사의 죽음에 주목하고 싶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 하숙집 딸과의 사랑 그리고 결혼으로 인해 친구 K를 잃었다. 자살한 친구 K는 전형적으로 수치심에 사로잡힌 불명예의 사무라이가 그러하듯이 자살로 선생님의 곁을 떠났다.


한국인에게 낯선 순사적 죽음이다.


이로 인해 선생님은 대학생 ‘나’를 만나기 전까지 죽음과도 같은 도피 생활로 자신을 억눌렀다. 죄책감을 선생님에게서 해체시켜줄 매개체가 필요했을텐데, 자살한 친구 K의 순사적 죽음을 고려한다면 남성이 매개체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1912년 여름. 대학졸업 후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나’는 긴 시간을 보내며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그러던 중 선생님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고 선생님이 이미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도쿄로 무작정 올라간다.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면서 말이다.

도쿄로 돌아가 선생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나’를 발견한다. 젊은 시절 선생님의 자화상을 통해 선생님의 과거사를 알게 되었다.


중학교 시절 부모님을 잃고 작은아버지를 후견인으로 삼아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재산에 눈이 멀어진 작은아버지가 선생님의 유산을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며 결별하는데.


선생님은 전 재산을 현금으로 바꾸어 도쿄로 되돌아왔다. 거처를 찾던 선생님은 순직 군인의 미망인과 딸이 사는 하숙집에서 미망인의 친절 속에 그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들의 사랑에 힘입어 작은아버지를 비롯한 타인에 대한 경멸과 미움을 떨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자신처럼 친구 K도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줄 요량으로 선생님은 친구 K가 숙소를 옮기도록 했다. 하지만 사모하는 하숙집 딸과 친구 K가 가까워지는 것을 의식하며 질투하고 시기하는데. 급기야 딸을 사랑한다는 괴로운 고백까지 친구에게 받는다.


친구 K는 하숙집 딸에 대해 품은 사랑의 감정을 선생님에게 고백했고 이에 조바심을 느낀 선생님은 하숙집 미망인을 급히 찾아가 딸과의 혼인을 요청하고 승낙 받는다.


결국 수치심에 고개를 떨군 친구 K는 이른 새벽 자살로 생을 끝냈다.


이 짧은 이야기 속의 선생님인 ‘나’가 겪는 심리변화와 내면의 이기심은 나쓰메 소세키에 의하여 걸작의 한 조각으로 그려졌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의 톤을 점점 높여갈 때 관객이 느끼는 그 긴장감이 압권이다.


읽는 이들의 심장을 쫀득쫀득하게 조여 온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를 향한 살리에리의 심리를 스크린에서 봤던 것처럼, 질투어린 시선을 친구 K를 향하는 선생님의 ‘나’에게서 여실히 그 장면의 쓰라림을 또 보았다.

선생님은 미망인과 딸에게는, 친구 K가 자신에게 딸에 대한 감정을 고백한 사실을 감추었다. 끝끝내 친구 K에 대한 죄책감과 이들 모녀에 대한 자괴감을 이기지 못해, 선생님은 매달 친구 K에게 성묘를 갔고, 장모가 된 미망인을 극진히 병간호하였으며, 아내가 된 하숙집 딸에게는 평생을 다정한 남편으로 속죄했다.

자아가 철저히 ‘나’의 시선에서 파헤쳐지고 낱낱이 분해되는 문체에 열광할 수밖에 없다.


‘과연 자아와 에고이즘의 극치를 끌어낸 걸작이구나’


글의 초반기에서 독자가 헤아릴 수 없었던 선생님의 에고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선생님의 ‘나’ 시점에서 난도질 수준으로 해체되는데. 실로 이 글의 흐름은 통렬함마저 안겨 준다.

‘아버지와 나’에서, 메이지 일왕의 죽음과 곧 이은 노기 장군의 순사 장면이 나온다. 친구 K의 자살과 선생님의 자책감에서 친구 K의 죽음을 순사로 내비치는 이 장면은, 나의 등골을 오싹하게 전율시켰다.


메이지 유신 시대를 살아온 구시대적 인물의 생존이 부조리이듯이, 떠나간 실연과 외로움의 시대에 구차한 이기심이 부조리이다.


선생님은 이를 없애버리고자 선생님 스스로 순사의 길을 택했다.


껄끄러운 소재와 작가의 제국주의적 관념이 눈에 심하게 거슬리지만, 반드시 읽고 감동받아볼 명작으로 추천하고 싶다. 고작 1910년대에 나쓰메 소세키는 이런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속의 일본은 쪽빨이가 서양 코쟁이들 흉내낸다던 어설픈 모습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자책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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