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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구라 47인의 무사들, 어린 시절 남자들의 로망

그 로망이 일본의 사무라이였다는 걸 몰랐지?

by 아메바 라이팅

글을 쓰면서도 읽는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는 듣는가, 의아하다. 아마 소재에 대한 무지로 인해 이해의 폭은 물론 깊이가 얕을 것이다. 세상의 지식과 만사는 끝이 없다. 그냥 읽고 외우시길. 또 죽자고 덤비지 말고.


일본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낭인 무사들의 무용담이 할리우드 서부영화의 원작이 되거나 혹은 모티브로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들어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는 1954년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고 서부영화의 원형이라 불리는 <황야의 7인> 영화의 원작으로 유명하다. 일본 농민이 멕시코 접경지대의 농민으로 바뀌었고 일본도를 든 칼잡이가 콜트 권총이나 스미스&웨슨 사의 리볼버를 든 총잡이로 바뀌었을 뿐이다.


19세기 자포니즘이 우키요에로 서양인들을 미치게 했다면, 1950년대 할리우드를 점령한 것은 일본의 사무라이 콘텐츠였다. 당연히 전 세계 영화시장을 장악한 할리우드의 서부영화는 사무라이 콘텐츠를 그대로 간직한 채, 우리나라의 어리고 젊은 남자들에게 꿈과 정의의 표본으로 자리 잡았다.


단순히 일본도를 든 파란 눈의 이방인이 나오는 영화만이 사무라이 콘텐츠를 차용한 것이라는 착각은, 깊은 문화적 봉건주의에 빠진 얼치기들의 변명이다.

에도시대 사무라이 무용담 가운데 일본인들이, 그리고 나도, 수백 년에 걸쳐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단연 ‘충신장’이다. 추신구라!


12월 14일이면 일본에서는 충신장과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가 텔레비전에서 다양하게 상영된다. 47인의 무사들 중심이던 시각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현대적 해석이 가미되어 악역인 기라에 대한 재해석 작품들도 간혹 등장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렇다.

교토의 천황은 매년 에도의 쇼군에게 사절단을 보내었고 쇼군은 이들을 맞이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 대정봉환이 있기 전까지의 관례였다.


1701년 아코 번주 아사노 다쿠미노카미는 사절단을 영접하는 중책을 맡았는데. 재물을 모으는데 혈안 된 기라 고즈케노스케에게 매번 핍박과 궁박을 받았다. 실제 영화에서 보면 짜증 날 정도로 치졸하다.


그래서 아사노는 4월 21일.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쇼군의 성 안에서 기라에게 칼부림을 하였다. 당시 쇼군의 성 안에서 칼을 빼드는 행위는 역적질로 여겨져 죽음으로 처벌받는 중죄였다. 결국 아사노는 할복하고 아코 번은 아사노 친구의 손에 넘어갔다.


이때 기라는 아사노의 낭사들이 자신을 암살할까 두려워 아사노의 칼에 죽은 것처럼 소문을 냈다. 하지만 기라의 술수를 알아챈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필두로 한 47인의 낭사들은, 중국의 강태공 마냥, 죽은 주군 아사노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버린 듯이 살며 세상 사람들과 기라의 눈을 속였다.


하지만 기어이 1703년 1월 30일(음력 12월 14일) 새벽. 기라의 저택을 공격해 기라와 그 일가들을 도륙한다. 그리고 이들은 아사노가 묻힌 센가쿠지로 기라의 목을 들고 가 복수를 완성하지만, 에도 막부의 결정으로 인해 1703년 3월 전원 할복하여 자결한다.

1603년 에도 시대가 열린 이후 1백 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보낸 당시 일본인들에게, 추신구라 47인의 낭사 이야기는 사무라의 정신의 정수일 수밖에 없었다. 전국시대의 사무라이 무용담이 현실 앞에서 펼쳐졌기에, 모두가 환호했다


각종 인형극, 가부키, 조루리, 강담 등의 다양한 장르에서도 추신구라의 아코 사건이 이후 일본인들에게 영원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일본인의 문화는 흔히 명예와 수치심으로 규정한다. 명예가 중시되다 보니 더럽혀진 명예를 좌시하는 것은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패배이다. 그래서 쉽게 용서하지 않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용서는 더럽혀진 명예를 방치한 수치스러운 도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서를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정의는 실천에 앞서 미덕에 대한 용기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덕과 용기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각 차이를 논할 필요는 제쳐두고서라도, 정의에 충만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상상해 보자.


굳이 죽어 볼 필요까지는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그대의 용기가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을 느껴봐라. 그게 우리가 서부영화에 열광했던 이유였고, 그 안에는 추신구라의 47 사무라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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