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의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약속

은혼식에 벤틀리를 선물해야 한다

by 아메바 라이팅
저희 결혼합니다. 오늘 웨딩 촬영했어요!


호프집 테이블 의자 위에 올라 소리쳤다. 마치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가 <축배의 노래 Libiamo>로 흥을 돋우듯,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권주가에 흥이 난 알프레도의 친구들과 비올레타처럼, 호프집 손님들과 여자친구는 맥주잔을 들고 환호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건 내 운명"이라고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에게 고백하듯이, 그날 나는 며칠 후 아내가 될 여자친구에게 진한 사랑을 고백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두 남녀 주인공은 비극적 결말로 사랑을 이루지 못했지만, 현실의 호프집 남녀는 사랑을 이루었다. 이루어도 너무 잘 이루어서 23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한다.


같이 너무 오래 사는 거 아닌감?


이십 대 초반에 불같이 타올라 순식간에 결혼했던 우리에 대한 우려와 달리, 너무 오랫동안 같이 살고 있다. 이만하면 생각보다 참 잘 살아왔다. 눈썹을 모아 올리는 겸연쩍은 우쭐함을 느껴도 좋을 만큼 우리 부부는 잘 살아온 것 같다.


기념일을 챙기는 낯선 문화를 24년 전 여자 친구를 통해 행복하게 즐겼다. 기숙사 자명종 대신 기상 알람용으로 소개팅녀들을 사귀기도 했는데, 지금의 아내는 의외로 여자 친구가 되었다.


소개팅 후 애프터를 할까 생각하다 잊고 지냈다. 석 달이 지나 주선자의 독촉으로 연락했다.


서울 올래요? 과외비 받았는데 술 살게요.



간다고 대답은 했지만, 석 달이나 지나 그냥 술마시자고 고속버스를 타기가 솔직히 귀찮았다. 하지만 그렇게 첫 데이트를 시작한 우리는 1년 후 부부가 되었다. 아내의 간택이 트리거였다면, 나의 번개탄 같은 화력이 사랑으로 대형 화재를 일으켰다.


야야, 네들 사고 칬나? 알라부터 벴나?



아니라고, 아니라고! 결혼 소식을 알릴 때마다 입에 붙었던 나의 대답이었다.


아니라카이! 맨몸으로 결혼한다.


그렇게 우리는 애는 고사하고 돈 한 푼 없이 결혼했다. 신혼여행 후 돌아온 신혼집, 기혼자 기숙사에는 신혼살림 빼고. 대한민국 조폐공사에서 발행된 지폐는 달랑 70만원이 전부였다.


사실 결혼식 1주년 때의 기억이 정확지 않다. 아마 장바구니 같은 싸구려 손가방을 사준 것 같다. 그때 육만원이었나 나 딴에는 큰돈 모아 아내에게 선물했었다. 아내는 깡충깡충 뛰면서 고맙다, 라고 좋아했지만 나는 기쁘지 않았다. 아내가 뛸 듯이 기뻐할 만큼 좋은 물건도 의미 있는 선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착잡하고 외롭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학위를 받는데 대해 처음으로 나 외의 사람에게 미안했던 경험이었다.


아들이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부부에게 결혼기념일은 내 생일과 함께 연중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그러고 보니 아들이 태어난 후에도 결혼기념일이 가장 중요하고 잊어선 안될 일자였다. 하지만 으레 며칠 전부터 아내에 의해 수차례 경고를 입어, 챙기게 되는 연중 공식 행사로 떠밀렸다.


그러다 보니 거의 돈이나 명품으로 때우는 일이 늘어났고, 식비에는 전혀 돈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가장 과감하고 화려한 식사로 레스토랑의 럭셔리를 돈으로 때웠다. 아내의 생일, 크리스마스, 연말연초, 거기에 이어지는 결혼기념일의 무지막지한 연타가 이어졌지만, 매년 그 또한 삶의 풍미로 만끽했다. 그래도 그 많던 결혼기념일 가운데 기억나는 게 없다. 호사도 잦으면 일상이 되는걸 배웠다.


이번에도 예년과 다름없이 미리 예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내가 바빠서인지 예전처럼 매일 학수고대하지 않는 것 같아 별다른 기분이 나지 않는다. 마치 캐럴송이 사라진 크리스마스를 맞는 기분이다.


며칠 전 단골 이자카야에서 아내와 아들. 셋이서 술 한잔 기울이다 몇 해 전 내가 뱉은 약속을 아내가 상기했다.


결혼 25주년 은혼식에, 벤틀리를 사주기로 했어.



내가 그런 약속을 했다고 아내가 말했다. 그런가? 내가? 아내는 내가 그랬다고 했다. 그런가 보다,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말했으면 해 줘야지. 약속은, 특히 아내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니까. 나는 아내의 상기를 각인했다.


아, 이제 2년 남았다. 벌써 23주년이라니, 이제 2년 남았다.



아내와의 약속에 진지한 삶의 목표나 철학 따위는 없다. 아내도 나도 우리 삶에 그따위는 끼워주지 않는다.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약속은 매사 이런 부류들이다. 그런데 한 번도 그런 약속과 선물을 부담스러워하거나 세속적이라 깔아본 적이 없다. 우린 이렇게 살다가 죽을 거다.


그리고 난 이런 결혼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내 인생이 좋다. 쾌락적이고 유쾌하다.


진지하기만 한 알프레도 앞에 비올레타가 쾌락의 이콘이었듯이, 내 인생에 아내는 삶의 유쾌함이다. 난 이렇게 살련다. 지극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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