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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Jan 14. 2020

어딜 가도 한국인이라고 알아보는 신체적 특징

참 신기하지?

미드, 영드, 일드, 중드를 자주 보다 보니, 극 중의 인물이 대략 어느 지역 출신 일지 감이 온다. 드라마 속의 캐릭터가 중국계라고 극 중에서 우겨도 한국계라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역시 구글 신에게 물어보면, 네가 맞다, 라고 손들어 준다.


세계 어딜 가도 한국인일 것 같은 사람이 눈에 들어오면, 잠시의 관찰로도 여지없이 출신 국적을 파악할 수 있다. 거의 틀린 적이 없다. 신체적, 행위적, 이미지적 차이점의 몇 가지만 지켜봐도 종합적 판단이 가능하다.


신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몽고주름이 확연하면 여지없이 한국계가 맞다. 한족이나 일본계는 몽고주름이 심하지 않고 오히려 눈시울이 펴진 경우가 많다. 그래서 몽고주름이 커 보이는 사람 가운데 세련된 옷가지를 걸쳤으면 거의 한국인이다.


추위를 피해 눈동자를 둘러싼 내피 밖으로 외피가 뒤덮어 생긴 주름인데, 웬일인지 한국계에서 많이 보인다. 한족이나 만주족을 만나도 눈시울이 깨끗하게 벌어져 있어 충격이었다.


손톱이 크고 긴 모양이 두 번째 특징이다. 서양인이나 한족은 단지증 환자들처럼 손톱이 짧다. 그래서 손이 예뻐도 어색하고 네일 화장을 한 금발이 나타나도 손톱을 보면 환상이 노래진다. 한국계의 길고 폭 좁은 손톱이 네일아트와 잘 어울려 케이뷰티의 유전적 경쟁력을 돋보여준다.


겨느랑이 냄새가 없다는 점은 축복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비행기나 버스 안은 가끔 잘못 걸리는 날엔 지옥이다. 소위 암내라는 겨드랑이 냄새가 데오드란트 특유의 방향성과 어울려 정신을 잃게 할 지경이다.


어린 시절 영국 기숙학교에서 지냈던 아들이, 방학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갈 때마다 데오드란트를 두 통씩 사갔다. 기숙사 사감이 돌아올 때마다 데오드란트 두 통씩 사 오도록 지침을 줘서였다. 지금에 성인이 되어 그때를 아들이 회상하면 꼭 데오드란트 얘기를 꺼낸다.


내가 걔들이랑 같은 줄 알고. 참 무식했어.


나 개인적으로는 술집의 아가씨들에게서 풍기는 그 냄새가 지역별로 기억에 각인되었다. 잘못 걸리면 접대받는 자리에서 테이블을 뒤엎을 수 있어서, 즉각적인 조치를 하는 게 모두에게 예의다.


한국말로 서로 짧게 '암내'라고 시그널을 보내면, 세계 어딜 가든 대충 알아듣는다. 말 말고 난감해하는 의미를.


귀지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매일 아침 귀지를 파고 귀 청소를 하는데도 오후만 되면 마른 귀지가 흘러넘친다. 보통 고역이 아니다. 가끔 귀 파주는 와이프는 한 움큼씩 떠내는 귀지를 청소하면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당사자 속도 모르고.


한국계는 땀의 분비가 백인 및 흑인종에 비해 적은 편이어서 귀지가 깡마른 편이다. 그래서 백인이나 흑인들에게 귀지파는 얘기를 하면 상상도 못 한 얘기에 놀란다. 물론 세계화되지 못한 미국적 무지렁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귀지는 진득한 고무찰흙? 같다고 하면 이해되려나 싶다.


이런 신체적 특징 외에도 한국계를 알아볼 특징이 있다. 얼굴 중심으로 모이는 표정의 변화다. 가식적인 미국계 물에서 살던 사람들은 표정이 호의와 말을 대신해야 하기에, 매우 과장되어 에너지를 크게 쓴다. 그래서 모든 표정들이 크고 얼굴 원형 밖으로 튀쳐 나가려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계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코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이마나 귀 주변까지 가지 못하고 인중을 중심으로 모여서 근육을 움직인다. 어떤 표정이든 근육의 활동량과 행동반경이 적으면 한국계가 맞다.


물론 미주교포들은 표정근육이 확장되어 있는데 백인계의 표정을 보고 자라면서 자신도 모르게 미러링 효과에 의해 그를 따라하다보니 교표들 특유의 양쪽 입가가 어색하게 벌어진 표정이 고착되었다. 가식적이고 억지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중국계는 무례하여 이마저의 표정 변화가 없고, 일본계는 늘 한 가지뿐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단 한 표정.


한국인을 알아보게 만드는 외형적 특징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에서 밝힌 것처럼 변덕진 동북아 날씨, 지형과 가로 경쟁 문화권 형성으로 인해 생물학적 적응의 전쟁을 크게 치른 트로피와 상흔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에도 마흔이 넘은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남의 말은 듣기보다 자르는데 익숙한 대화법, 미간을 지프리며 강변하는 설교적 대화법, 혼자서는 미천한 자괴감에 주눅 들다 광장에 좀비 같은 떼거지를 만나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프로파간다적 좀비 성향, 공항부터 관광지까지 등산복과 투어버스로 드러내는 국적성. 조금 화나면 너른 배부터 추켜올리는 허접성, 현대 한국계가 자신의 모습에 대해 아직은 책임질 생각이 없나 보다.


어찌 갈수록 퇴보하는 느낌이 나만 느끼는 감정인가? 이상하다. 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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