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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메바 라이팅 Jan 13. 2020

아큐정전을 읽으면, 길바닥 전업 시위자들이 떠오른다.

자기가 혁명군인 줄 안다, 실제는 동네 호구인데.

1921년 중국의 신해혁명 시기를 전후하여 미장이라는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다. 정전이란 단어는 어느 촌부의 그저 그런 인생의 토막 이야기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아비정전이라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면, 주인공 이름이 아비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그렸기 때문에 영화 제목이 아비정전이다. 즉 근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이 쓴 아큐(아Q)에 대한 이야기 소설이란 점을 기억해 두자.
 
아큐는 농촌 미장에서 농가들의 부역이나 해가며 먹고사는 비렁뱅이다. 그래서 아, 뭐시기 쯤으로 이름도 아Q다. 아큐는 마을의 신사 같은 역할을 하는 토곡사에서 기거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존재다.
 
아큐는 동네 지주 조家나 수재에게도 늘 매를 맞으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데, 동네 건달들에게도 늘 머리를 가 터지도록 쥐어 터지고, 시장의 식당에서나 비구니가 사는 절간에서도 늘 바보 취급을 받거나 내쫓긴다.


청나라 말기 신해혁명의 시기까지 서구 열강들에게 1세기 동안이나 유린당했던 중국민의 모습이 아큐 그대로이다. 구폐에 빠져 서구 열강에게 난도질당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에서 패배의식을 버리지 못하며 자책하는 당대 중국인의 대중성을 여실히 비판하였다. 아큐라는 바보 천치를 통해서 말이다.


왠지 서초동과 광화문 앞에서 주말마다 목청을 올리는 얼빠진 전업 시위자들의 대중성을 본다. 쓰레기는 자기가 갈 곳이 쓰레기통인지 모른다. 작금에 자신의 주장을 주말마다 확성기를 켜고 진영의 억지만을 틀어놓는데 전업한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에게 아Q적 존재다. 지들 팔자가 아큐라는 걸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가서, 아큐는 힘으로든, 말싸움으로든, 간계를 부려서든 대항하거나 항변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큐는 스스로를 ‘상전으로 만들거나, 할애비 등의 웃사람으로 만들거나, 혹은 사람들을 천하다고 여겨’ 자신이 오히려 상종하지 않는다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며 위안한다. 서초동과 광화문 떨거지들과 똑같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상상 속에서 벌인 싸움을 상상으로 이겨낸 것을 두고 만족하며 히죽거린다. 정말 똑같지 않나?


 당연히 사람들이 아큐의 이런 정신세계를 알 리가 없다. 소위 수천 년을 이어에 타민족에 대한 중화사상을 통쾌하게 비판하였다. 당대 최우선적으로 철폐되어야 할 중국민 스스로의 우월의식을 허상 그 자체로 그렸다. 그리고 지금의 빠돌이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미장처럼 외진 농촌 마을에까지 신해혁명의 기운이 밀려들어오자 아큐는 또다시 스스로 자신이 혁명군에 가담했다고 상상하면서 비구니 절간을 얼쩡거리다가 진짜 혁명군에게 도둑으로 몰려 총살당한다. 혁명의 시대에 혁명의 일원이 되지 못하는 대다수의 중국민을 조롱하며 혁명의 실패를 통탄하는 루쉰의 애절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곧 오늘의 서초동과 광화문 전업자들이 한국판 루쉰의 역적이 될 것이다.
 
아큐는 총살당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왜, 어디로, 무엇을 하러 끌려왔는지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끌려가는 자신을 보며 사람들이 환호한다고 착각한다. 자신이 혁명군인지 반동인지조차 구분 못하는 진상의 모습이다. 이윽고 아큐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사람들에게 아무런 흔적도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총살당했다. 정말 똑같다. 빠돌이들의 무지가 고금을 막론하고 우습다.
 
아Q를 보면, 측은하기보다 속이 시원하다. 우리에게도 하루빨리 아큐의 총살 행군이 어여 오기를 희망한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알의 세상을 파괴한다. 아Q가 죽어 새로운 중국 인민의 해방투쟁이 도래했듯이, 빠돌이들이 자기세상을 파괴한 후 자멸한다면, 우리 민주주의도 좀더 봐 줄만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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