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현대 소설과 무협영화의 로망이 1980년대부터 동양 문화에 꽂혔다. 닌자 어쌔신. 이 두 마디 숙어 같은 타이틀에 서양 식자층의 미디어 매니아들이 열광했다.
닌자는 일본의 암살이나 테러 등을 목적으로 하는 자객을 말하고, 어쌔신은 중세 급진 수니파의 암살단인 아싸시들의 암살 행위를 유럽인들이 미화해 부른 말이다. 그래서 닌자 어쌔신은 오리엔트 이슬람과 자포니즘이 혼합한 짬뽕 코드다. 무식한 백인들의 대중문화 소재화 극성이 만들어낸 우스운 돌연변이다.
어쌔신처럼 닌자란 말도 영어권 식자들을 위해 영어식 일본어를 즐기던 19세기 후반 일본인들이 음독 표현으로 만든 단어다. 원래는 '시노비 노 모노忍びの者'라고 부르던 주인집 하인들을 부르던 말이 영어식 음독을 위해 ‘忍者(잠입하는 사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즉 사무라이와 다른 닌자는 잠입해 엿듣는 하인들로서, 지금 영화에서처럼 사무라이같이 무술이나 의리를 지키는 존재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닌자가 입는 유니폼같은 검은 옷도 서양 문학인들이 만들어낸 트레이드 마크다. 가부키 막간에 세트를 준비하거나 극중 인물은 보지 못하는 등장인물을 관객에게 표식하기 위해 검은옷을 입었는데, 주인공 몰래 잠입해 관객에게만 보이는 자객은 모두 검은옷을 입는다고 선입견을 벤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는데, 가부키를 관람하던 서양 작가들이 무지의 소산으로 만든 창작이다.
닌자와 사무라이는 완전히 다른 존재인데, 실제 닌자란 존재가 없었다, 사무라이 또한 우리가 아는 추신구라 같은 존재들은 드물었다. 돈을 지불한 윗사람에게만 용기를 베푸는 용병이었고, 무사도를 위해 죽어간 사무라이는 돈키호테 같은 정신착란증 환자였다.
실제 무사도는 19세기 말 일본의 외교관이자 작가인 니토베 이나조가 쓴 <부시도: 일본의 정신>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다. 기사도를 읊던 중세 기사들이 철갑옷을 입고 놀던 한량이었듯이, 무사도(부시도) 역시 양아치 사무라이들에게 없었던 허위 과장극의 소재다. 영국식 기사도에 눈뜬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식으로 꾸며낸 허풍이다.
이렇듯이, 그럴싸한 거짓말은 진실이 신발을 신기도 전에 세계의 반 바퀴를 돌고 있다.
세상을 살다 보니 늘 웃으며 착하게 사람들과 지낸다고 여겨지는 자들에게는 과장된 허구의 이미지가 떡하니 자리 잡는다.
저런 사람은 분명히 선하고 정의로울 거야.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선의식을 가진 정의로운 자로 믿다가 큰 코를 다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겪지 못했다면 아직 좋게만 지내왔을 뿐, 정작 선의식과 정의를 시험할 난관에 닥치지 못해서이다.
사람들과 잘 지낸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의 선의식에 입각한 의견과 원칙이 없다는 것이고, 어느 누구도 지지하거나 조력할 뜻이 없다는 반증이다. 즉 착하게 웃으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반드시 모두에게 무관심한 회색종자다. 자신만을 위해 악마보다 못한 뒤통수를 시원스레 날릴게 뻔하다.
진실은 항상 허상의 거짓보다 작고 미약하여 왜소하고 뜀박질이 느리다. 그래서 바보 같은 진실은 항상 세상의 반 바퀴만큼도 거짓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세상 사람들이 거짓만 보다가 지루해 지쳐 진실이 들어올 때까지 참지 못한다.
6시간대에 쥐 난 다리를 질질 끌며 결승선에 들어오는 인간승리 마라토너를 지켜보기 위해서는, 3시간이 지나더라도 묵묵히 경기장을 지키고 기다리는 관중만이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의 겉모습과 관계에 섣불리 신의를 가지거나 믿음을 보여선 안된다. 여지없이 배신의 그날을 신랄하게 맞으며 분노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큰 일을 겪고 무심한듯 한발짝 떨어져 지내든 친구의 진심을 보았다. 그 친구가 말했다.
"주변에 가장 원만하고 친화적인 사람을 경계하라. 그저 온화한 표정의 가면을 쓴 기생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