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어스(나+us)

뜨거운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 열다섯 번째 라오스 이야기

by beingwriter

라오스는 국민의 약 70% 정도가 불교를 믿는다. 그래서 새벽 길에 승려들의 행렬을 볼 수 있다. 사진은 주민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드리는 탁발 모습이다. 이런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서 외국인들도 밥을 사서 승려에게 드리기도 하는데, 나는 그 모습을 참견하지 않고 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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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 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탁발 문화를 직접 보러 갔다. 김언니는 미쳐 날 뛰는 나때문에 참 고생이 많다. 퉁퉁부어 눈이 반쯤 가려졌어도 내 눈에 감동이 담겼다. 선순환의 모습을 새벽에 보고 있자니 콩 한 쪽도 서로 나누는 것이 이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는데, 승려들이 자신들이 받은 것을 길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승려가 받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음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는 모습에 놀랐다. 그것이 진정한 상생이었다.


음식을 받는 아이들을 보며, 이것을 받기 위해 어두운 새벽부터 걸어와 차가운 바닥에 자리를 잡았을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의 무거움에 고춧가루를 뿌리며, 참된 공유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모습이 보였다. 플래시를 사용하며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과 조용한 거리에서 시끄럽게 말하는 사람 때문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김 언니가 약 10년 전에 와서 탁발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사진도 멀리서 찍고 가까이에는 가지 않아서 매우 조용했다는데, 이날의 새벽 탁발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나와 같은 여행객의 시선이나 누군가의 직접적인 사진 촬영이 음식을 받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거나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났다. 어쩌면 배고픔이 그것마저 참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탁발 문화의 순간을 남기고 싶어서 멀리서 승려들의 뒷모습을 찍었지만, 이 또한 내 추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았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떤 게 옳은지.


타인과 나는 나라는 기준으로는 남이고, 친구와 같은 기준으로는 우리가 될 수 있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더라도 결국 모두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반자인데 누굴 다르다고 할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그것을 구분할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경제적인 부분은 부의 세습이라 하여 대물림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 돈인데, 음식을 받던 아이들을 우리와 다르게 여기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든다. 내가 그 아이였다면 어땠을까? 생존을 위해 타인의 시선을 참아야 하는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공감하진 못하더라도 유쾌한 일은 아니란 것은 명확하게 안다.


요즘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처럼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안 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고구마 같은 상황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 상대방을 ‘나’이거나 내 가족이라 생각하면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없을 텐데 왜 넓게 사람들을 담을 수 없는지 아쉽기도 하다. 그렇지만 나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서 계속 노력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나도 또 다른 우리이니 타인의 입장에서 내가 어떤지 돌아보면서 행동하려고 늘 생각하고 노력한다.


‘나 때는’으로 시작하는 것은 나보다 어린 사람한테 말을 시작하는 거라 ‘꼰대’가 되고 ‘저희 때는’으로 시작하는 것은 나보다 어른에게 말을 시작하는 거라 ‘싸가지 없는 인간’이 된다. ‘옛날에는’, ‘요즘은’으로 시작하며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의 생각이나 상황이었다고 말하면 좋아할까? 아니. 그냥 획일적인 기준을 잣대로 들이대는 게 문제라서 어떤 말로 표현하든 마인드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존중하며 인정하는 자세가 죽을 때까지 필요하다.



“한 끗 차이로 관심은 부담, 라떼 는 꼰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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