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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별 Jul 14. 2023

기억구슬

실천 4. 엄마가 있는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이 기쁨이를 라일리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기억의 쓰레기장'에 자신을 내던지는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변함없는 눈물버튼이다. 라일리가 어린 시절 상상 속에서 함께 놀던 친구였던 빙봉은, 라일리가 자라면서 무의식 어딘가에 존재하다가 이제는 앞으로 영원히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 되어버렸다. 내가 잊어버린 소중한 추억은 뭐가 있을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애도하며  이 장면을 보다가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본 건지 알 수 없어 답답증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아이를 들여보내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서가를 둘러보던 중 [모래요정과 다섯 아이들]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흥분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다 보니, 여름철 신나게 따라다녔던 연막소독차(a.k.a 방귀차) 연기처럼 뿌옇고 흐린 기억 속에서 <모래요정 바람돌이>라는 만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세상에! 사라진 빙봉이 돌아왔다!!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구슬과 비슷하게 <모래요정 바람돌이>에는 추억구슬이 나오는데, 최근 기억은 투명하게 떠다니고 오래된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가라앉으며 잊힌 기억은 이내 까맣게 변해 바닥으로 떨어져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된다. 까맣게 변한 구슬을 깨뜨리면 잊힌 추억을 다시 볼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히 잊게 된다는 설정이 어린 마음에도 어찌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내 삶은 만화가 아니라서, 영원한 망각을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들여다볼 기회도 없이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은 최면에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어찌 떠올려 볼 방법이 없다. 그래도 다행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따뜻한 노란빛을 반짝이며 내 기억저장고에 잘 보관되어 있는 많은 순간들이 있 그 예쁘고 따스한 장면들에는 대부분 엄마가 있다.


어려서는- 빨간 고무 대야에 나를 앉히고 목욕시켜 주는 엄마 손길, 밀가루 반죽에 물감을 섞어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점토의 빛깔, 일요일 아침에 디즈니 만화를 보고 있으면 제법 근사하게 만들어주던 엄마표 돈가스의 맛, 어린 내 모습이 담긴 사진 뒷면마다 어떤 상황인지 적어두었던 동글동글한 엄마 글씨체,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놀다가 도자기를 깨뜨렸을 때 '안 다쳤으면 괜찮으니 걱정 말라'라고 말해주던 엄마 목소리..


좀 더 커서는- 시집가는 딸에게 아껴둔 그릇이며 이불을 꼼꼼하게 챙겨주는 엄마 뒷모습, 내가 만들어 준 휴대전화 가방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활짝 웃는 엄마 미소, 친정에 가면 엄마가 나를 꼭 안아줄 때 느껴지는 엄마 냄새, 내가 '어렸을 때 먹던 동네 빵집 고로케 맛이 아직도 생각난다'라고 딱 한 번 말한 걸 듣고 마가 냉동실 가득 채워둔 옛날 고로케의 바삭한 식감..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엄마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더 많은 추억을 남겨놔야 할 텐데. 엄마가 사라진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엄마 조각을 갖고 남겨질까.


행복한 순간을 만나면 '추억구슬'에 잘 저장해 두고 까맣게 변하지 않도록 때때로 떠올리려고 애쓰던  시을 지나 이제는 스마트폰 카메라와 구글 드라이브에 그 역할을 넘겨버린지도 한참이다. 스마트폰으로 마음껏 사진을 찍게 되면서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정성껏 바라보는 시간이 줄다. 찍어두고 나중에 보면 된다는 생각이 순간순간을 오감으로 온전히 기억하는 을 방해하는 것 같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자꾸만 불안해지고 만다. 내가 이 장면을 기억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잊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 사진을 한 장만 찍고, 마음껏 바라보면 되잖아~!' 아, 정말이지 어떨 땐 아들이 나보다 더 현명하다. 엄마, 다음에 만나면 우리 사진은 딱 한 장만 찍고 마주 보고 오래오래 이야기 나눠요.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단감으로, 엄마가 나를 태우고 처음 운전했던 빨간 프라이드 자동차로, 길 가다 딸이 생각나서 사둔 냉장고바지로, 엄마한테 읽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시의 한 구절로, 같이 추억구슬을 잔뜩 만들어요.




이미지 출처

•빙봉 - 즈니플러스에서 캡처

•모래요정 바람돌 - https://www.amazon.co.jp/dp/B092W11JS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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