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를 읽고
[제인 에어]를 읽으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 사람은 19세기 사람이 아니라 21세기 의식을 지닌 채 그 시대에 불시착한 사람은 아닐까?'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고딕풍 저택, 숨 막히도록 위계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녀는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하고 순응하는 듯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제인 에어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상으로부터 뒤돌아 서지도 않는다.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하고, 떠나고, 돌아온다. 마치 "나는 나를 먼저 사랑하고 그다음에 너를 사랑해 줄게"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이게 정말 1847년에 쓰였다고? 이 정도면 요즘 소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에 빠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책의 모든 부분이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로체스터의 어떤 언행은 요즘 기준으로 '그린 라이트'가 아니라 '레드 플레그'에 가깝고, '이건 좀 아닌데?' 싶은 구석도 있다. (제인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질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시험하거나, 자신이 이미 결혼한 상태라는 사실을 숨긴 채 제인에게 청혼하고 사실이 밝혀지자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는 모습은 당시의 맥락을 감안하더라도 '신뢰'라는 기본까지 무너뜨리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조차도 제인의 어른스럽고도 멋진 태도를 통해 해소된다. 그녀는 어떤 강요에도 "No, thank you."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녀는 외적인 조건 앞에서 작아지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오랫동안 배제되고 침묵당했던 존재들이 가질 수 있는 고요하고 단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로체스터도 그녀의 이런 점에 매력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제인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지하면서도 그 안에 함몰되지 않고, 감정과 이성/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지만 결국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선택을 해나간다. 책 두께에 잠시 압도되었지만,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을 주체성과 자율성을 진주처럼 품고 빛내는 그녀의 궤적을 따라가는 일은 내게도 하나의 자기 탐색의 기회가 되었다.
나에게 제인 에어는 '운명'이나 '사랑'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선택한 인물이다. 상대를 향한 열정이 아무리 크다 해도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선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식하는 사람,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고통스러운 선택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제인 에어는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에 살면서도 '작은 존재로 자신을 숨기는 법'을 강요받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녀가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는 것 같다. '자기 목소리를 잃지 말고 너도 너의 삶을 살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