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읽고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를 처음 접했을 때, 제목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영어 원제 Wide Sargasso Sea의 wide를 ‘광막한’으로 옮긴 역자의 선택이 특히 눈에 띄었다. 어떤 단어는 이야기의 문을 열기 전에 이미 그 안의 공간을 예고하는데, ‘넓은’이나 ‘광대한’보다 더 문어적이고 아득한 느낌의 ‘광막한’이라는 단어는 아직 책을 펼치기도 전에 이 이야기가 지닌 분위기와 정서를 보여주는 듯했다. (작은 단어 하나가 불러오는 감탄의 폭이 매우 클 때가 있는데, Small Things Like These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번역되었을 때 느꼈던 놀라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라는 책 제목은 몇 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워낙 강렬한 제목이라 기억에 남았지만, 그것이 제인 에어 속 ‘버사 메이슨’에서 비롯된 상징이라는 건 이번에 [제인 에어]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함께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남편의 저택 다락방에 갇힌 채 ‘광기’의 이름으로 침묵당했던 그녀는, 오랫동안 '고전'이라 불리는 긴 이야기 속에서 그렇게 조연 혹은 그림자로만 존재해 왔다. 작가 진 리스는 바로 그 억압된 인물에게 이름을 되찾아주고,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고전의 주인공이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주변의 인물을 다시 보는 일이었고, 말하지 못했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었다.
역자의 각주를 참고해 가며 읽은 이 작품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난히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역자의 설명과 여러 해석의 도움을 받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여성의 비극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유산, 인종과 계급의 경계, 크리올의 정체성 혼란, 백인 우월주의적 시선과 젠더 권력의 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서사였다. 그래서 문화적,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의 깊이에 닿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앙투아네트의 비극은 단지 한 개인의 불안정한 심리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가 그녀를 바라보는 방식 때문이었으므로.
자메이카에 도착한 로체스터는 “이곳의 모든 것이 나를 거부하는 것 같다”고 말하며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환경을 하나의 적대적 공간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만약 인종주의/계급주의적 시선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향기와 눈빛을 그렇게 낯설고 위험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면 - “그녀의 눈은 내가 모르는 시간을 품고 있다”거나 “이곳은 매우 낯설지만 묘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앙투아네트를 ‘광기어린 성가신 존재’가 아니라 그저 다른 세계를 살아온 하나의 주체로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그들의 결혼은,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평행우주 어딘가에서는 그녀가 '버사'가 아닌 '앙투아네트'로 불리며 사랑받고 이해받는 삶을 살고 있으면 좋겠다. 광막한 바다가 아닌, 생기넘치는 자연 속에서.)
사르가소 바다는 바다 한복판에 있으나 해류에 갇혀 떠돌기만 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정체성을 잃은 채 -흑인도 백인도 아닌, 본토도 식민지도 아닌, 남편의 사랑도 증오도 아닌, 자연도 문명도 아닌 경계에서- 부유하는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그 바다처럼 아득하고 외롭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가 그녀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 기울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깊이와 울림을 품고 있는 것 같다. 고전의 그림자 속에 ‘his crazy ex-wife’로만 기억되던 여자가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얼마나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커버이미지: Wide Sargaso Sea/ Penguin Books Student Edition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