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 영멘>부터 <던전밥>까지, 묘한 위로의 세계
만화책은 내 성장의 풍경이자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하는 취미다. [밍크], [윙크] 잡지를 엎드려 보던 유년기, 만화책 대여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십 대, 개강 전날 밤 [원피스]를 몰아보던 대학 시절을 지나, 이제는 월급으로 만화책을 사모으는 중년이 되어 아직도 2차원 주인공들이 얽히고설키는 다이나믹한 세상을 동경하고 애정한다.
그중에서도 어쩜 이렇게 기발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어 마음을 빼앗긴 세 만화가 있다. 책장을 펼치면 잠잠했던 일상이 금세 들썩이는 이야기들. 수영장에 간 예수님이 모세의 기적을 일으켜 수영장 물이 반으로 나뉘고, 천사들은 하느님의 오더를 받아 새로운 동물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회의 중이며, 던전에서는 모험가들이 두 발로 걷는 버섯 마물을 잡아 전골과 튀김을 만들고 있다. <세인트 영멘>, <천지창조 디자인부>, <던전밥>. 이름만 봐도 기묘한 세상이 그려지는데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설득력 있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인데, 풋 하고 웃으며 왠지 믿고 싶어진다. 처음엔 단순히 '너무 기발하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 하는 감상으로 읽고 지나갔는데 자꾸 책장을 넘기다 보면 웃음 너머에 있는 이야기의 깊이를 더 느끼게 된다.
첫 번째는 신성모독의 위협을 안은 설정이 눈에 띄는 <세인트 영멘>. 부처와 예수, 두 신성한 존재가 인간 세상으로 휴가를 나와 세속의 언어로 살아간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부처는 예술가들이 자신이 살쪘을 때 모습만 예술품으로 남겨 스트레스를 받고, 예수는 크리스마스는 자기 생일인데 다들 산타만 찾는다며 질투를 하기도 한다. 성스러움과 개그가 만나는 순간, 삶에 묘한 위로가 스며든다. 잡지 공모전에 도전하며 고군분투하는 예수님이나 할인 마트에서 절약을 고민하는 부처님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저들도 저렇게 애쓰는데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말도 안 되지만 제법 효과는 좋은 동기부여가 된다. 신들도 '살아간다'는 메세지가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겨서, 이 작품은 마냥 개그 만화로만은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는, 코미디로 위장한 괴짜 과학 수업 같은 <천지창조 디자인부>.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동물의 모든 생김새에 다 이유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으나 동물을 만들기 귀찮아서 천사들로 이루어진 디자인부에 하청을 준다는, 독특한 -여기도 다소 신성모독의 기운이 느껴지는- 설정의 장벽을 넘고 나면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디자인부 소속 천사들은 '높은 곳에 있는 먹이를 먹기에 적합한 동물(기린)'이나 '날개가 없는데 나는 동물(용)' 등 갑질에 가까운 터무니없는 신의 오더를 받아 들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끝없는 회의와 실험을 반복한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육성으로 웃음이 터지는 동시에, 회의지옥 속에서 클라이언트의 만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천사들의 직장생활에 공감하다가 동물 생태의 경이롭고 치밀한 원리에 진심으로 감탄하게 된다. 엉뚱하고 웃기지만, 제법 과학적이라서 아이들과도 같이 읽고 싶다. 게다가 우리 주변의 모든 생물이 이런 길고 긴 치밀한 회의의 결과물이라고 상상하면, '세상에 이유 없는 존재는 없구나'하는 생각에 세상이 훨씬 더 정교하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가장 판타지스럽지만 어쩌면 가장 일상적인 이야기인 <던전밥>. 판타지 속 요리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얼핏 보면 오크, 엘프, 드워프가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들이 던전을 모험하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던전 여행 경비를 아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마물을 잡아먹는다'는 현실의 그림자가 묻어난다. 대부분의 모험담에서 생략되기 쉬운 '먹고 자고 씻는 일'에 집중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각 마물의 특징에 맞는 조리 과정이 꽤 상세히 담겨있어 '드래곤 테일 수프'나 '만드레이크 튀김'은 도대체 어떤 맛일지 상상해 보는 즐거움도 크다. 요리는 즐기지 않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비슷하다. 매일의 피로와 불안이라는 마물을 재료로 삼아, 그날그날 버티는 법을 익히고 현실을 조리하며 하루를 넘기는 일상을 살고 있으니까. 주인공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우겨본다.
이런 만화들을 보면 '기발하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이 이야기들에는 단순히 엉뚱하거나 웃기다는 차원을 넘어 '세상을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지엄한 존재를 소박하게, 무서운 마물을 식재료로 바라보며 익숙한 질서를 살짝 뒤집어 작품을 완성한 작가들 덕분에 나도 내 상식을 비틀어보고 그 틈으로 새로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직장생활과 집안일 속에서 '정말 이 방법밖에 없을까?',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같은 질문이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건, 이 만화책들이 내 안에 심어준 기발함 씨앗 덕분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으면 내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이지만, 엉뚱함으로 철학을 말하고 웃음으로 진심을 전하는 이야기들을 그래서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오늘 밤은 잠들기 전에 나만의 '말도 안 되지만 왠지 믿고 싶은 세계'를 조용히 그려보는 것도 좋겠다.
* 혹시 요즘 현실이 너무 평범하거나 무겁게 느껴진다면, 기묘하고도 설득력 있는 이야기 하나에 기대보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