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즐기는 세 가지 방법

조금씩 '우리' 동네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by 빛별

처음 이 동네로 이사 온 건 아주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이전 동네에서는 학교와 아파트 사이의 거리가 멀어 아이들이 아파트 셔틀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는데, 매번 시간표를 확인하고 셔틀버스가 고장이라도 나면 당장 등하교 방법을 고민하는 등 일상의 번거로움이 쌓여 결국 이사 결정을 내렸다. 거기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군, 그리고 가까운 학원가. 모든 조건을 따져 계산한 끝에, 올해 초 우리는 이곳으로 이사 왔다.


신축 아파트에 살다가 오래된 아파트로 옮기니, 처음에는 불편한 점이 적지 않았다. 지하주차장이 아파트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비 오는 날 장이라도 보면 장바구니를 들고 빗속을 걸어야 한다. 외출할 때 집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미리 호출할 수 없는 구조도 처음엔 꽤나 불편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아이들도 처음에는 이전 동네를 그리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할 만큼(아니면 이미 익숙해진 걸 지도 모르겠다) 이 동네가 점점 좋아졌다. 일요일 아침엔 조금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터벅터벅 걸어서 영화관에 가고,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에도 주차 걱정 없이 치킨 상자를 달랑달랑 들고 경기장으로 향할 수 있는 동네. 이사하면서 걱정도 많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저희 동네 참 좋아요'라고 나도 모르게 말하게 되는 곳.


그래서 나만의 방식으로 이 동네를 조금 더 즐겨보기로 했다. 계획은 단순하다.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고 최선을 다해 실행에 옮겨보기.


1. 관찰자 모드로 걷기

이다작가님 도시관찰일기 소개 페이지에서 가져온 이미지

이다 작가님의 [도시 관찰 일기]를 읽고 나도 매일 걷는 길을 조금 다르게 보고 싶어졌다. 휴대폰 메모장에 '오늘의 동네 풍경'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 아파트 출입구 위에 매일 주홍빛이 진해져 가는 감 하나

- 미술학원 앞에 전시된 그림이 바뀌었다. 요즘은 인물화를 연습하나 보다.

- 어제는 없던 국화 화분이 편의점 앞에 놓여있다. 편의점 사장님 덕분에 가을을 미리 맛본다.


늘 지나치던 풍경이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다. 관찰은 애정의 재료구나.


2. 단골집 만들기

어떤 가게의 단골이 된다는 건 그곳에 내 마음의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에서 뿌리가 점점 깊어지는 일 같다. 카페, 분식집, 미용실, 소아과 등 이사 온 후로 네이버 평점이나 맘카페 정보를 토대로 후보지를 좁혀나가며 하나씩 단골로 삼을 만한 곳을 늘려나가고 있다. 운동 끝나고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는 편의점에는 그 시간대에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과 자주 마주치게 되어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는다. 남편이 자주 가는 카페에서는 남편이 들어서면 사장님이 아메리카노 내릴 준비를 시작한다고 한다. 거의 매일 가는 피트니스 센터에서는 '오늘은 무릎 좀 어떠세요?'하고 안부를 물어온다. 학부모 공개수업이 있는 날이라 오전 강습 시간이 한가했다는, 근처에 새로 생긴 돈가스집이 아주 괜찮다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늘어날수록 이 동네는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하루의 이야기들이 겹겹이 쌓인 나만의 지도가 된다.


3. 요일마다 이벤트 만들기

별것 아니지만 반복되면 은근히 기다려지는 요일 루틴을 이벤트처럼 생각해 보았다.

- 수요일: '학습지 선생님댁 나들이 날'. 이전 동네에 살 때는 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오셨는데, 우리가 우연히 선생님이 살고 계신 동네로 이사 오면서 반대로 아이들이 선생님 댁으로 찾아간다. 바로 옆 동에 살고 계시니 가는데 3분도 안 걸린다. 아이들은 공부도 하고, 때때로 맛있는 간식도 얻어먹고 돌아온다.

- 목요일: '장터 돈가스의 날'. 아파트 앞마당에서 열리는 장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 메뉴. 수제 돈가스. 전화로 미리 예약을 하거나 한 박자 빠르게 가야 기나긴 줄을 피할 수 있다. '누님', '형님'으로 손님들과 거리감을 훅 좁혀오는 사장님의 친근함은 장터의 소음과 기름 냄새도 잊게 만든다.

- 금요일: '순대 트럭이 안 보이면 서운한 날'. '오늘은 간 많이 주세요', '지난주에 안 오셔서 정말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라는 말이 어쩐지 훈훈한 저녁을 만든다. 길었던 한 주를 마감하는 최고의 보상.

- 토요일: '새벽 산책의 날'.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a.k.a. 이전 직장동료)와 함께 동네 공원을 걷는 것으로 주말을 시작한다. 아직 동네가 깨어나기 전, 우리처럼 주말을 일찍 시작하는 사람들과 공원을 걷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테이크아웃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주말의 시작이 특별해진다.


지금은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만 이벤트가 있지만, 언젠가는 월, 화, 일요일도 자연스레 어떤 기억으로 채워질 거라 믿는다. 평범한 요일들에 작은 이유 하나씩 생기고 변화하는 순간들을 기대한다.


어떤 동네든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몰랐을 세세한 결이 있다. 요즘 나는 그 작은 결들을 하나씩 느끼고, 들여다보고, 마음에 드는 부분은 반복으로 그 무게를 키워가고 있다. 그렇게 매일이 조금씩 다정해지고 있다. 조건만 보고 이사 온 동네인데 마음으로 머물고 싶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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