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이야기 속 인물들이 알려준 진실을 마주하는 법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보는 일은 종종 여행과 닮아 있다.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 낯선 공간을 거닐고, 그 안에서 나와는 다른 논리를 가진 다양한 인물들을 마주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세랑 작가의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와 BBC드라마 <파더 브라운>은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나는 이 두 여행지에서 비슷한 종류의 몰입을 경험했다.
처음 마음을 사로잡은 건 그들의 색다른 겉모습이었다. 책장을 넘기면 통일신라의 수도 금성의 모습이 펼쳐진다. 한복과 당나라 복식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고, 그 위로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TV를 켜면 복고풍 의상을 입은 인물들이 엔틱 가구로 채워진 저택에 앉아 잔잔한 대화를 나눈다. (내용은 살인 사건이지만,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평화롭기까지 한 풍경이다.) 매번 벌어지는 살인사건의 무게를 조용히 감싸는 1950년대 영국 시골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이야기 그 자체만큼이나 흥미롭고 아름다웠다.
이런 풍경 안에 또렷하게 자리 잡고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 '여성들'이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장을 한 채 살아가는 주인공 설자은(본명 설미은)을 비롯해 그녀의 여동생 설도은, 죽은 오라버니의 정인이었던 산아 등 조연 여성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며 함께 이야기를 이끈다.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가톨릭 신부님이라는 파격적인 주인공인 브라운 신부님 곁에도 성당 살림을 살뜰히 챙기는 맥카시 부인, 귀족 여성 번티와 레이디 펠리시아 등이 정서적 중심을 이룬다. 각각의 인물들이 단순한 주변인이 아니라 나름의 서사를 가진 인물들이라 반가웠고 작품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는 수사물이다 보니 모종의 사건이 발생하고 그 진상을 밝히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데, 하나의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로 징검다리 건너듯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멈춰서 감탄한 지점이 있다. 바로 설자은과 브라운 신부님이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추리극에서 진실은 밝혀져야 하는 '정답'이다 -'범인의 바로 너!'&'네가 사용한 트릭은 이것이야!'의 흐름이 일반적이다. 범인을 밝혀내고, 끝까지 추적하고, 처벌함으로써 이야기가 완결된다.
브라운 신부님은 조금 다르다. 이야기의 흐름 자체는 다르지 않으나, 그는 진실을 밝힌 후 법의 심판에 넘기기 전에 범인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기회를 주고자 한다. 두려움 때문에 회피하거나,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하는 무른 태도가 아니다. 이런 선택에는 죄지은 자의 영혼마저 회복시키려는, 브라운 신부님의 신념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설자은도 비슷한 면이 있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뱃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범인을 알면서도 굳이 드러내지 않고, 용왕의 아들을 자처하는 이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또 다른 위험한 상황을 겪지 않도록 조용히 손을 써준다. 때로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보다 상처를 덜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다. 이런 조용한 판단들 속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의'라는 단어의 의미가 훨씬 넓어졌다고 생각했다.
이 두 사람만큼 명석한 두뇌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나도 내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실수했을 때,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내 실수가 아닌 일에 책임을 떠안게 됐을 때. 그 잘못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스스로 상황을 마주할 수 있도록 기다리는 일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일은 때로는 마음이 끓어오를 만큼 속상하고, 큰 손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쩌면 진짜 용기는 그런 순간에 내 판단에 따른 정의보다 그 사람의 성장이나 마음의 회복을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일상 속에서 범죄자를 마주할 일은 거의 없지만, 작은 갈등 속에서도 누군가의 잘못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늘 찾아오니까.)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두 작품이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주인공들의 그런 태도 덕분인 것 같다. 나의 옮음이나 억울함을 주장하기보다 상대방과 나의 마음을 돌보는 방식으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면 잔뜩 구겨진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려나. 두 주인공이 남긴 시선을 좇아 조금 더 단단하고, 더 품이 넓은 사람으로 지내고 싶다. (비상한 두뇌회전도 닮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