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깜빡, 그럼에도 무사히

파란 책은 어디에... 건망증과 함께하는 나날의 생존기

by 빛별

책 욕심이 많은 편이다. 구입해서 읽는 책 외에도 학교 도서실, 예전 동네 도서관, 지금 사는 동네 도서관까지 오가며 책을 빌린다. 부지런히 읽기는 하지만, 여러 곳에서 빌린 책들을 쌓아놓다 보면 가끔은 연체도 하고, 제목만 읽은 책을 아쉬움 속에 반납하기도 한다.


며칠 전, 학교 도서실 책들을 한꺼번에 반납했는데 대출현황 창에 책 한 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행히 반납기한이 아직 남아있어, 일단 집에 가서 다시 찾아보겠다고 사서선생님께 양해를 구했다. 혹시 바코드가 잘못 찍혔을 수도 있다며 도서실에서도 다시 찾아보겠다고 하셨다.


책을 구분해서 도서관별로 가방에 담은 기억이 선명한데, 혹시 잘못 섞였을까? 차 안에서 떨어졌나? 책상 위 어지러운 서류 더미에 파묻힌 걸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자리로 돌아와 다시 살폈지만 없었다. 결국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탑 해체작업에 돌입했다. 아이들 책장, 안방 책장, 거실 책꽂이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없다. 파란 표지의 그 책은 어디로 갔을까?


혹시 며칠 전에 반납한 동네 도서관 책더미에 섞인 걸까? 시스템이 다르니까 바코드가 안 맞을 텐데. 그래도 가장 유력한 가능성이니 다음 날 전화를 걸었다. 없단다. 혹시 이사 전 동네 도서관? 그쪽도 아니란다. 아이들이 장난치느라 엄마 책을 숨긴 건 아닐까? 그런 적은 없는데. 그래, 그날 차에서 가방이 넘어졌지. 그때 앞 좌석 밑으로 굴러 들어간 걸까? 과일도 아니고 책이 굴러가긴 하려나... 이쯤 되면 거의 수사물이다. 손에 패가 몇 장 남지 않은 도박사처럼, 가능성 하나씩 지워나갈수록 가슴이 뛴다. 어디에도 그 책이 없다.


물론, 새 책을 사서 반납하면 끝나는 일이다. 큰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철렁한 건, 그 책이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게 단순한 실수인지, 내 뇌가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놓기 시작한 건 아닌지. 이 불안한 기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며칠 후, 뜻밖의 곳에서 파란 표지의 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 맞은편에 앉은 동료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예전에도 그 동료에게 내 책을 빌려줬었다.

- 어, 혹시 그 책... 제 책상에 있던 거예요? 개인적으로 사신 거예요?

- 이거 얼마 전에 자기가 빌려준 거잖아~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퍼즐처럼 착착 맞춰졌다.

- 아이고, 진짜 책 좋아하네. 여러 권 빌려온 것 같은데 재밌는 거 있으면 나도 좀 빌려줘봐.

- 아, 이거 제 지인이 정말 재밌게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다른 거 먼저 읽을게요. 이거 한 번 보실래요?

그렇게 말하며 책을 건넸던 내 모습이 그제야 떠오른다.


책을 찾은 기쁨도 잠시, 아... 나 정말 괜찮은 걸까? 책을 보고도 기억해내지 못한 내 기억력에 불안이 한 점 불꽃처럼 피어올라 마음 구석을 그을리기 시작했다.


사실 내 깜빡증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긴 했다. 인덕션 위에 프라이팬을 올려놓고 다른 일 하다가 화재경보기를 울릴 뻔하고, 운동복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잊어서 축축한 빨래를 하룻밤 묵히고, 주차장에서 내 차 찾기는 일상에, 아이들이 '모바일펜스 풀어달라'고 전화하면 '응' 해놓고 잊어버리기도 기본 코스다. 출근할 때는 아이들이 내 뒤통수에 "엄마, 차 키랑 핸드폰 챙겼어요?"하고 확인까지 해준다.


가장 최근에는 아이들 학교에 학부모 공개수업 참관을 가려다가 이사 전에 다니던 학교로 갈 뻔했다. 갈림길에서야 눈이 번쩍 뜨여 주먹으로 머리를 콩콩. "너 진짜 어쩌려고 이러니!!" 육성으로 답답함이 터져 나왔다. 나는야 세상에서 제일가는 건망증 왕, 바보 멍청이 성게 말미잘...


이쯤 되면 정말 기억 장애를 의심해야 하는 거 아닐까. 유튜브에선 '80세 노인도 영어공부를 할 때 뇌 속 뉴런이 가지를 뻗는다'며 용기를 북돋지만 위로가 안 된다. 내 뉴런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토마토 모종처럼 누렇게 바싹 말라 있을 것만 같다.


그래, 내 기억력은 구멍 난 주머니 같고 뇌는 종종 단세포보다 못한 것 같다. 그게 뭐 어때서(하고 넘겨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 중이다). 어쩌면 이 건망증들은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려다 넘쳐버린 흔적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돌아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나도 모르게 몇 장면쯤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것.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깜빡증 속에서도 내 뇌는 매일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다. 중요한 약속은 아슬아슬하게 떠올리고, 반찬 태우기 전에 냄비 불도 끄고, 모바일펜스도 한 박자 늦게나마 풀어주며 어쨌든 하루를 넘긴다. 완벽하진 않지만 무사히, 꾸준히.


주말 일정을 잊어버려도, 전날 정해둔 저녁 메뉴가 떠오르지 않아도, 나를 기억하고 찾아온 졸업생 이름이 도저히 기억이 안 나도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다. 오늘도 깜빡하는 나를, 실수투성이인 나를 살짝 끌어안는다. 스스로가 한없이 멍청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와도, 데헷 하고 웃어넘겨보려고 한다. 오늘도 깜빡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하루는 무사히 흘러간다. '나'라는 이야기가 무탈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아껴주자. 그러다 보면 구멍도 조금씩 메꿔질지도 모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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