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한형과 차쥐뿔을 자꾸만 보게 되는 이유를 탐색하며
가끔은 앞뒤 딱딱 맞는 완벽한 문장보다, 취기 섞인 웅얼거림이 더 진실하게 느껴지는 밤이 있다. 최근 신동엽의 <짠한형>이나 이영지의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 같은 술자리 콘텐츠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사람들은 유명인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를 보고 듣고 즐긴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대화라는 게 참 별거 없다. 말은 자주 끊기고, 웃음은 맥락 없이 끼어들고, 문장은 끝을 맺지 못하고 허공을 떠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느슨함'이 오히려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술자리는 참 기묘한 공간이다. 말이 조금 어긋나도, 감정이 흘러넘쳐도 어지간해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머리를 감싸 쥐며 이불킥을 날릴만한 흑역사를 써도 '취해서 그랬다'거나 '기억이 안 난다'는 마법의 주문 한마디면 많은 게 용서된다. 그래서 술자리는 안전하다. 꼭 정확하지 않아도, 단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니까.
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마음의 끈을 슬쩍 내려놓는다. 평소라면 꿀꺽 삼켰을 말들, 망설이다 끝내 사라졌을 고백이 잔을 채우는 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우리는 그 조각난 말들에 '취중진담'이라는 근사한 이름표를 붙여주기도 한다. 술이 들어가면 계산적인 가면은 녹아내리고, 그 틈새로 숨겨둔 진실이 툭 튀어나온다고 믿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연인 사이에서도, 친구 사이에서도 취해서 한 말은 종종 맨 정신에 한 말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술은 진실의 묘약이라기보다 뻥튀기 기계에 더 가깝다. 감정을 증폭시키고, 기억을 흐리게 하고, 말의 크기를 키울 뿐이다. 찰나의 불안을 '내 인생은 늘 그랬어'라는 숙명으로 만들거나, 잠깐의 서운함을 '사실은 예전부터 참아왔는데'라는 거창한 서사로 바꿔놓기도 한다. 사라진 맥락 속에서 취기를 빌려 내뱉은 말은 숨겨뒀던 사실을 비추는 정직한 거울이라기보다, 순간의 감정이 부풀어 올라 찍힌 스냅샷처럼 보일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취한 말에 무게를 두는 걸까. 아마도 그것이 연습되지 않은 말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잘 보이려고 계산된 말이 아니라서 우리의 경계심도 덩달아 무너지는 거다. 어쩌면 우리는 대단한 진실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상대방이 꽁꽁 숨겨두었을 그 '서툰 진심' 한 조각을 놓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비록 내일이면 부정할지도 모르고, 다시는 꺼내지 않을 말일지라도, 그 밤 그 순간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던 마음의 흔적이니까. 이성적으로 아무리 무시하려 애써도 누군가가 취해서 한 말이 자꾸 마음 한구석에 남는 건, 그게 그 사람의 가장 날 것 그대로의 모습처럼 보이기 때문일 거다.
내가 남의 술자리를 구경하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완벽하게 정리된 인터뷰도 좋지만, 말이 끊기고 웃음이 새는 대화가 훨씬 사람 냄새나고 친근하니까. 그 허술한 대화를 보며 나도 모르게 나의 서툰 모습들을 겹쳐보게 된다. 그래서 나에게 술은 '잠시 가면을 내려놓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조명 같다. 그 조명 아래서 우리는 안심한다. 나만 이렇게 서툴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 모두 조금씩은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는 사실에 위로받는다.
... 그러니 오늘 밤은 적당히 취하고, 기꺼이 서툴러보아도 좋겠다. (상대방에 대한 험담이나 망언이 아니라면) 내일 아침의 이불킥은 내일의 나에게 잠시 맡겨두고 단단한 가면 뒤에 숨겨둔 진심을 꺼내보자. 오늘 당신이 내뱉은 그 서툰 말들이 당신을 조금은 더 가볍게 만들어주기를 바라며 당신의 이불킥을 기꺼이 응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