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듣지 못하는 사람의 듣기 다짐

의미 있는 대화는 듣기가 기본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며

by 주연

나는 말을 잘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은 나더러 말을 재미있게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을 조리 있게 한다고 칭찬한다. 사회 생활을 하며 그런 칭찬을 자주 듣는 편이다 보니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본의 아니게 대화를 주도하는 때가 많은 편이다. 그런데 말은 참 이상한 것이 하면 할수록 할 말이 계속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친한 친구와 한참을 카톡이나 전화로 수다 떨다가도 대화가 끝날 때는 "자세한 건 만나서 또 얘기해"라고 마무리 인사를 하는 것일까? 나의 이야기보따리는 한없이 넓고도 깊어 얘기를 해도 해도 계속할 이야기가 무한 생성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못하는 게 있는데 바로 듣는 거다. 친구가 내가 무언가 할 말을 있어 만나자고 했더라도 이내 친구가 말하려는 목적은 놓친 채 내 이야기보따리만 풀어놓고 올 때도 있었다. 재미있게 대화하고 돌아오는 것 같다가도 그래서 친구는 오늘 왜 만나자고 했더라? 하며 친구의 마음은 듣지 못했던 것 같아 개운치 않았던 적이 있었다.


아들과의 대화는 어떤가. 얼마 전 시험이 끝난 아들이 드디어 '위대한 개츠비'를 다 읽었다고 내게 자랑 아닌 자랑의 말을 건넸다. 아이의 말을 듣고 그저 칭찬만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가 내게 자랑하는 것은 무언가 엄마의 코멘트가 필요해서일까 봐 이내 책 얘기를 물어본다. 사실 중학생인 아이는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큰 과제를 수행한 기분일 텐데, 엄마는 개츠비가 쓰인 시대부터, 작가는 왜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생각했을까 등등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망설이는 아이에게 엄마의 생각을 말해버린다. 조금만 더 기다려서 아이의 생각을 들어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결국 책에 대한 내 얘기만 한 것 같아서 후회가 몽글거린다.


학급의 담임을 맡아 아이들의 상담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상담이란 서로 상, 말씀 담. 글자 그대로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일 텐데 아이가 고민의 끄나풀을 던져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의 생각을 아이에게 쏟아낸다. 마치 교사가 고민에 대해 조리 있게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느껴져 훌륭한 상담을 하는 것 같아도 사실 내담자의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한 나만의 독백인 때가 많았음을 새삼 고백한다. 당시 우리 반 아이들은 내게 고민의 끄나풀만 풀어줬을 뿐 본인 생각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러다 보니 말을 잘한다는 주변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말을 잘하는 사람 같지 않다. 대화라는 것은 경청이 기반인 것인데 나는 왜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기다리질 못할까. 급한 나의 성미 때문인가. 넘쳐나는 나의 이야기보따리 때문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해줘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는 걸까.


밖에 나가 이야기를 많이 하고 돌아온 날은 뿌듯함 보다는 후회나 듣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는 날이 더 많다. 듣고 싶은데 나는 결국 듣지 못하는 듣는 여유가 없는 사람은 아닐까.


어떤 고민은 말하다 보면 해결되기도 한다.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던 친구나 학생들도 어쩌면 나의 대답이나 생각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잘 들어줄 것 같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었을 수 있겠다. 잘 들어줄 사람 같다는 믿음을 받았으면서도 잘 듣지 못하고 내 얘기만 했던 것 같아 새삼 미안하다. 책을 읽고 하는 대화도 조금의 질문으로 이끌어 갔더라면 어떨까. 내가 생각하는 개츠비의 위대한 점을 말하기보다는 아들이 생각하는 개츠비의 대단한 점은 무엇이었을지 얘기할 수 있게 판을 좀 더 마련해 주었더라면 귀하디 귀한 아들 생각도 들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새삼 결심해 본다. 말을 잘하는 사람 말고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사람들이 이야기를 망설이는 잠깐의 휴지를 편안한 표정으로 기다려주고 따스한 눈빛으로 말할 터전을 마련해 주자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과 생각을 듣는 것은 좋은 관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귀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의 쓰기 모임인 '주수희'의 이번 쓰기 주제는 '듣는 사람'이었다. 나처럼 못 듣는 사람에게 '듣는 사람'이라는 주제가 주어진 것은 운명 같다. 이제부터라도 잘 들어보자는 다짐의 기회를 주는 운명 말이다. 하지만 다음 주수희 만남 때도 이러한 다짐을 새까맣게 잊고 주절주절 내 얘기를 늘어놓게 될까 걱정이다. 내가 힘들었던 얘기 속상했던 얘기를 다정하고 따스하게 들어주는 수와 희 언니의 눈빛으로 회복되었던 경험이 있으면서 다른 이에겐 그런 기회를 주지 못했던 지난날이 다시금 아쉽다. 그래도 듣고자 하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으니, 잘 들어주는 나의 수와 희언니에게 기대어 나도 잘 듣는 사람에 대열에 합류해보고 싶다.

잘 들어주는 수와 희언니, 내 말이 많아지면 손을 꼭 잡아줘요


(@표지 사진은 인스타 탐험 중에 마음에 와닿아 캡처해 둔 사진. 하 왜 공감이 가는 걸까. 못 듣는 것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혹시 INFP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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