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하루 속 다정한 쉼표

일상 속 작은 정지 버튼, 컵에 대하여

by 빛별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물을 끓인다. 잠든 몸을 부드럽게 깨우는 따뜻한 물 한 잔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컵을 고른다. 체리 그림 아래에 ‘정신들 체리세요’라는 문구가 적힌 컵을 들고 있으면, 괜히 작은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울퉁불퉁한 컵은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재미있어 마치 장난감을 쥐고 있는 아이처럼 마음이 말랑해진다. 따뜻한 물과 함께 그날의 다짐도 함께 컵에 담아본다.


​출근길, 한 손에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을 본다. 테이크아웃 잔이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는 엔진처럼 보인다면, 머그잔은 거친 숨을 고르게 하는 다정한 정거장이 되어준다.


직장에서도 분주하게 키보드를 눌러대던 손을 멈추고 텀블러를 챙겨 일어나 ​물을 끓인다. 전기포트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티백을 고르고, 쪼르륵. 컵에 담긴 온기를 천천히 마시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의 목록에서 잠시 빠져나온다. 컵은 분주한 내 하루에 놓인 작은 ‘정지 버튼’이다.


​가끔은 이 시간이 마법 포션을 마시는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은 컵 안에는 오후를 버텨낼 집중력이 들어 있을지도, 혹은 지친 마음을 다독일 용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뿐인데, 어느덧 몸과 마음은 다시 움직일 채비를 마친다.


​이런 마법 같은 순간은 회사에서도 불쑥 찾아온다. 바쁜 오후, 동료가 투박한 종이컵에 음료 한 잔을 나누어 줄 때다.


이거 마시고 해.”


​그 말과 함께 건네받은 종이컵에는 커피보다 진한 다정한 마음이 담겨 있다. 평범한 종이컵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는 무언의 신호가 가득하다. 각자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전의 짧은 휴식. 그 시간만큼은 우리 모두 같은 속도로 천천히 차를 마신다.


그리고 하루의 마지막에도 컵은 다시 등장한다. 퇴근 후, 냉동실에 넣어 두었던 맥주잔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유리잔에 맺힌 하얀 성에가 하루 동안 쌓인 피로처럼 보인다. 그 위에 시원한 맥주를 천천히 따르면, 거품이 잔 위로 차오른다.
이 컵에는 오늘을 무사히 끝냈다는 작은 축하가 담긴다. 아침의 컵이 하루를 시작하게 했다면, 이 맥주잔은 하루를 잘 접어두는 역할을 한다.


컵의 모양과 재질은 제각각이지만 역할은 같다. 팽팽하게 당겨진 하루에 쉼표 하나를 찍어주는 일. ​생각해 보면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컵을 쥐고 나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다.


“잠깐 쉬어도 괜찮아.”


​컵은 말이 없지만, 내 하루를 가장 다정하게 멈춰 세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만의 마법 포션을 마신다. 체리가 그려진 상큼한 컵으로, 때로는 누군가의 온기가 담긴 일회용 종이컵으로, 그리고 하루를 잘 견뎌냈다는 신호처럼 차가운 맥주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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