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고
새 학기 반편성 명단을 받아 들고 이름을 빠르게 훑는다. 어떤 이름들은 교사의 입에서 낮은 탄식을 끌어낸다. 그 이름 뒤로 작년 담임선생님의 피로 섞인 표정이나 교무실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사고의 잔상이 어두운 그림자처럼 따라오기 때문이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했는데 마음 한쪽이 벌써 바빠진다.
반대로 아무 결 없이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도 많다. 특별히 떠오르는 이야기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사건도 없는 아이들. 기억에 남지 않는 그 이름들이 역설적으로 내 흐트러진 마음을 진정시켜 준다. 그 아이들은 올해도 평온하게, 아무 문제 없이 지내줄 것이라는 조용한 확신 덕분이다.
이 차이는 생활기록부를 쓰는 시기가 오면 뼈아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어떤 아이들에 대해서는 적을 이야기가 넘쳐난다. 상담하면서 나눈 대화, 갈등을 중재하며 보낸 긴 시간, 가슴 졸였던 순간들까지. 고단했던 시간을 '성장'과 '가능성'이라는 단어로 정성껏 갈무리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아이들 앞에서 발생한다. 이름 옆에서는 깜박이는 커서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크게 잘못한 일도, 눈에 띄는 사건도 없었던 아이들. 이 아이들이야말로 평온한 학교생활을 지켜준 진정한 주인공들인데, 정작 그들의 칸에 채울 문장이 부족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이 미안함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그 끝에는 '믿음'으로도 '방심'으로도 읽히는 나의 '안심'이 서 있다.
"저 애는 괜찮아. 걱정할 게 없는 애야."
'어른들의 믿음을 받는 아이'로 받아들여지는 이 말을 오래도록 최고의 칭찬으로 알았고, 우리 아이도 이런 말을 들으며 학교에 다니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읽은 뒤, 이 문장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1999년 미국의 콜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의 가해자 딜런 클리볼드의 어머니인 수 클리볼드는 아들이 세상을 떠난 뒤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지며 이 책을 썼다.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기보다 자신의 기억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나는 무엇을 보지 못했을까. 나는 왜 몰랐을까'를 자책하는 기록이다. 책을 관통하는 가장 서글픈 문장은, '딜런은 걱정할 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딜런은 어릴 때부터 온순했고, 부모에게 반항하지도 않았으며, 학교에서 큰 문제를 일으킨 적도 거의 없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해 보였다. 그는 누구보다 '평범한 학교생활'의 모범답안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안심했다. 딜런이 죽음을 꿈꾸고 분노를 키워가는 동안에도 그는 '걱정할 것 없는 아이'라는 분류 속에 안전하게 놓여있었다는 점이 수 클리볼드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도저히 편하게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걱정할만한 아이가 아니었다'는 문장이 너무 익숙해서 불편했다. 교사로서, 또 엄마로서 나 역시 수없이 써왔던 말이기 때문이다. 소위 '문제아'를 감지하는 레이더는 날카롭게 갈아두면서도, 문제없는 아이를 응시하는 눈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보지 않았다. 싸움, 지각, 잦은 수업 방해 같은 신호는 요란하지만, 소리 없이 자신의 안으로만 파고드는 우울은 배경음처럼 묻히기 쉽다.
어쩌면 '문제없는 아이'라는 말은 아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더 이상 자세히 보지 않아도 된다고 믿고 싶은 어른들의 '게으른 확신'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겼다. 아이가 조용하고 문제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우리가 시선을 거두는 순간, 아이는 교실의 배경으로 소외될 수도 있다.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아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된다고 믿어버린 아이는 아닐까.
이 책의 끝에서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부모도, 교사도 아이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서늘한 겸손을 가르쳐준다. 교사로 짊어진 책임의 무게와 엄마로서 아이를 믿는다는 마음의 무게가 동시에 무거워지는 밤이다. 내일 교실에 들어서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앉아 있는 그 조용한 얼굴들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이 바라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