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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룰루랄라맘 Dec 09. 2020

타협은 없어! 창피함은 엄마 몫

저 이상한 엄마 아니에요~

“정빈아, 정말 이거 입고 싶어?”


회사 복직 시기를 고려해 어린이집 입소 대기 신청을 미리 했다. 그 덕에 아이들이 3살이 되던 해인 3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복직 전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집 적응기간을 여유롭게 갖고 싶어 6개월 전부터 어린이집을 보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답답하지 않고 바깥바람도 쐴 수 있는 마당이 있는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태어나서 줄곳 엄마와 함께한 아이들을 떼어놓을 생각에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아직 행동반경이 크지 않은 3살 아이한테는 넓은 곳보다 선생님의 시야에 한눈에 들어오는 안전하고 아담한 공간이 더 좋을 수도 있다. 아이들이 햇빛을 보며 놀 시간도 이미 정부에서 정해 놓아 하루 일과 중 한 번은 꼭 바깥놀이나 산책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집을 등하원하면서 700m의 거리가 어른 걸음으로는 10분 안쪽의 거리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게는 30분이 될 수도, 1시간도 될 수도 있는 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집에서 어린이집에까지 가는 길은 여러 루트가 있었다. 복직 전 등원의 최적 거리를 찾기 위해 하루하루 다른 길을 시도해 보았다. 그중 시장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이었다.

마트 오픈전 과일, 채소가 들어오는 마트를 지날 때면 아이들은 연신 눈에 보이는 것마다 “이건 뭐야?”하고 둘이 번갈아 가며 물어봤다. 영혼이 자유로운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발견하면 그대로 주저앉아 뚫어져라 한참을 쳐다보곤 했다.

어린이집에 늦겠다고 이만 가자고 하는 엄마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미동도 없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떠야만 할 이유에 대해 당위성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얘기해봤자 3살 된 아이들에겐 먹히지 않았다. 타협이란 절대 없다. 이 자리를 떠야만 할 당위성은 엄마에게만 필요한 것이었지 아이에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호기심이 충족되야만 움직이는 아이들이었다. 그 뒤로 시장을 가로질러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은 하원길에만 이용했다. 등원길은 그나마 아이들이 주저앉아 멈출 요소가 적은 길을 택했다. 바쁜 출근 시간에 예상치 못한 이슈를 최대한 만들지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다.  


등원길만 문제가 아니었다. 옷도 문제였다. 자기 주관이 생긴 3살 아이들은 옷도 자기 마음에 드는 옷만 입으려 했다. 입혀달라고 가져오는 옷들을 보면 '이런 패션 감각은 어떻게 장착'하게 됐는지 엄마인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조합이었다. ‘패션 테러리스트가 따로 없네. 나야? 남편이야? 이런 패션 감각은 누구한테 물려받은 거지?’ 속으로만 생각했다.


딸인 채원이는 레이스 달리고 리본 달리고 여성스러운 잠바들도 많은데 굳이 왜 정빈이도 잘 입지 않는 남색 잠바를 입고 가겠다고 가져왔을까.


“채원아 이거 말고 방에 예쁜 잠바 있잖아. 그걸로 입을까?”

“싫~어!”


단호한 그녀다. 나는 그 옷을 입지 않았으면 하는 당위성과 논리로 몇 번이나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고자 했으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싫다고 한다. 타협이라곤 일절 없는 아이와 옷으로 실랑이를 계속 벌이다간 또 등원 시간에 늦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또 어느 날.

이번엔 정빈이가 등원 전 채원이의 노란 원피스를 가지고 와서 입혀 달란다.  


“정빈아, 정말 이거 입고 싶어?”

“응~!”

“왜~?”

“예뻐.”


또 단호하다. 이 옷을 입지 않았음 하는 엄마 마음이 담긴 어설픈 당위성을 들먹여 봤자 먹히지도 않을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동안 옷으로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봤자 별 소득 없이 나만 지친다는 것을 이미 채득한 나는 타협을 포기하고 왜 입고 싶은지 정빈이에게 물어봤다. 들어보니 며칠 전 어린이집에 갈 때 이 노란 원피스를 입은 채원이가 예뻐 보였던 모양이다.

치마 입고 등원한 정빈이. 정빈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돋보기는 당시 애착 물건 1호였다.

설득 대신 이번엔 치마라 불편할지도 모른다고 아이에게 말해주면서 혹시나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갈아입고 싶지 않을까 싶어 아이 어린이집 가방에 여분의 옷을 챙겨 넣었다. 그새 커서 주변에 관심도 생기고 채원이가 뭘 입고 있었었는지도 기억하고 있는 아이가 한편으론 대견해 보였다.     


여자아이가 남자 옷을 입고, 남자아이가 여자 옷을 입고, 그렇게 입힌 채로 시장을 지나 인도를 지나 아이들 손을 양손에 꼭 잡고 어린이집으로 걸어갔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귀엽다며 인사를 할 때면 내 얼굴은 의도치 않게 붉어졌다. 그리고 난 그들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말을 굳이 말한다.

  

“아이가 이 옷을 참 좋아해요~~ 호호”

 다음 말은 속으로만 했다.

‘저 이상한 엄마 아니에요. 제 취향이 이런 건 아니에요.’


어린이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맞아주는 선생님께도 아이가 왜 이 옷을 입고 등원하게 되었는지 궁색하게 자세히 설명하게 된다. 요지는 이렇다.

'저 이상한 엄마 아니에요. 이런 난해한 취향을 가진 엄마는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 아이들 예쁘게 잘 봐주세요.' 




회사 복직 후 후배 워킹맘이 아이 사진을 보여준다.

머리엔 미스 유니버스 버금가는 화려한 왕관, 귀엔 왕 귀걸이, 목엔 가슴까지 내려와 목이 꺾일 것 같은 묵직한 보석이 알알이 박힌 목걸이, 하나론 모잘라 양팔에 걸친 보석 팔찌들, 손가락 하나도 빼놓을 수 없다는 야무진 집념이 보이는 반지로 꽉 찬 손가락, 마지막으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망사 원피스를 입은 당당한 포스가 느껴지는 여자아이 사진이었다.


“오늘 지수 이러고 어린이집 갔잖아요. 저 정말 창피해서 혼났어요.”

“그 맘 내 다~ 알지. 그것도 한때야~. 아니다. 아이마다 달라서 언제까지 이럴지 장담 못해. 미안해.”


이미 겪어본 선배맘으로 한 개라도 덜 걸치게 하려고 애썼을 후배맘의 고단했을 아침 등원길이 예상되고도 남았다. 아이의 난해한 패션 스타일이 언제 나아질지도, 언제 끝날지도 모를 타협이라고는 일절 없는 아이와 후배맘의 동행은 한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창피함은 온전히 엄마 몫이다. 엄마의 기준에서 '이 옷은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지 아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직접 선택해서 입었으니 얼마나 뿌듯할까?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첫 단추는 엄마의 창피함에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쿨하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난해한 아이의 패션 스타일 정도는 인정해주자. 엄마가 이해할 수 없는 고매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아이 입장에선 엄마의 패션 스타일이 '패션 테러리스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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