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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Oct 31. 2020

영화는 끝났고.. 현실에서 마주한 너와 나 #7

완벽하지 않은 그래도 따뜻한

다음날 아침, 샤워를 마치고 미처 챙겨 오지 못한 헤어드라이기를 빌려줄 수 있냐고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밤새 여기 온 걸 후회하면서 나 자신을 미워했던 탓일까? 이미 와버린 이상 쓸데없는 짓인 줄 알고 있었지만 한번 멀어진 우리의 심리적 거리는 쉽사리 가까워질 수 없었다. 


헤어드라이기를 가져온 그는 손수 내 머리를 말려주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마음 한 구석이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정한 그의 눈빛과 손길이 앞으로 남은 날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겁이 났다. 성급하게 빠져들었던 마음 때문에 사실은 별 것 아닌 일에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 둘 다 그것을 알기에 이제는 조금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기로 했다. 지난달 우리가 함께했던 3일의 시간은 너무도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현실세계와 함께 존재할 수 없는 기억 같았다. 현실로 돌아온 우리는 비로소 우리를 둘러싼 주변의 것들에도 눈을 돌려 볼 수 있었다.

 



이제야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알아갈 시간과 공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것도 비록 1 달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된 그는 생각보다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다. 단둘이 있을 땐 재미있는 농담이나 바보스런 장난을 치곤 했지만 부모님과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무척 과묵했다. 또 그는 행동이 아주 느렸다. 집안에서는 느림보 중에 느림보로 이미 소문이 자자했다. 그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했고 어릴 적부터 수학과 과학을 잘했단다. 난 솔직히 그가 나에게 접근한 것을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심했었다. 내가 아시안이라서, 그냥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 즐기기 위해서, 백인 우월주의가 있는 건 아닐지, 혹은 왕따나 찌질이는 아닐지... 등


그런 의심들이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끌리는 마음은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부모님과 형제, 친구까지 만나고 나니 그는 마음씨가 착하고 모질지 못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장 친한 친구 중에 중국에서 이민 온 친구가 있었고 우연한 기회로 검도를 배웠으며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를 가까이했다. 그런 이유로 동양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가진 유러피안에 대한 선입견은 그들이 냉혈한이라는 것인데, 이 남자는 우리말로 따지면 순둥이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가게의 점원이나 우연히 마주치는 행인들에게도 배려심 있게 대하는 그를 보고 안도감이 들었다. 오해는 오해일 뿐이었다고..




"Can I come in?"

(똑똑, 들어가도 될까?)

"O.. Of course!"

(으... 응!)


그러던 어느 날 밤. 그가 잠옷 차림으로 내 방 문을 두드렸다. 조금 놀란 나는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내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긴 팔을 휘둘러 나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싸움에 화해를 한 마냥 그동안 마음속에 있었던 불편과 미움을 녹여냈다. 


다음 날은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다. 내가 더블린에 온 공식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의 크리스마스는 흡사 우리의 추석과 같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잘 만나지 못하는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하루 종일 요리한 칠면조를 나눠먹는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선물을 나누고 지난 1년을 돌아보며 다가올 1년에 대한 소원을 비는 의미 있는 날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기대감에 휩싸였다. 산타클로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5살 때부터 알았던 나지만 오늘 밤만큼은 내 머리맡에도 선물을 주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 눈을 뜬 나는 거실로 내려갔다. 이미 샴페인을 마시고 있는 가족들. 라디오에서는 캐럴이 흘러나오고 빨간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인 장식들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조금은 어색한 발음으로 나에게 인사하는 그의 식구들. 그들은 메리 크리스마스가 한국어로 무엇인지 찾아보았으니 그것에 상응하는 표현을 찾지 못해 한국어 발음으로 읽기를 시도한 것이다. 성탄절이라는 우리나라 말의 표현이 있지만 구글에서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런 노력이 어딘가 싶어 웃음으로 화답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나에게 선물 꾸러미를 주셨는데 그 안에는 파자마, 머그컵, 향수, 바디로션, 초콜릿, 크리스마스 카드가 들어있었다. 나는 난감해졌다. 나도 나름 한국에서부터 선물을 준비해오긴 했는데 딱 1개만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렇게 꾸러미로 주고받는 줄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준 선물꾸러미도 있었는데, 선물 중 하나는 사랑을 맹세하는 아일랜드의 전통 반지-클라다 링이었다. 그는 쑥스러워하며 반지를 건네기만 하고 차마 내 손에 끼워주진 못했다. 나도 어색하게 반지를 받아 들었고 생각보다 큰 사이즈에 여러 손가락에 끼워보다 마침내 검지에서 끼워보기를 멈췄다. 나는 이렇게 미숙한 우리 둘이 좋았다. 어딘지 서툴고 완벽하지 않은 그래도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어젯밤 나의 기도를 들으셨던 걸까. 나는 이날 캐리어에 다 넣지도 못할 만큼 많은 선물을 받았다. 인생에서 가장 벅찬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3일간의 만남, 9개월의 영상통화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된 이야기를 연재할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은 없어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


1편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lullukumi/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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