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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Nov 03. 2020

아직도 남친, 여친이 아니라고? #8

차라리 가지고 논 거라 해줘.

우리는 한동안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그는 나를 친척들에게도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나를 무척 반갑게 반겨주었다. 손수 만든 테이블 이름표는 감동이었다. 한국 국기에 내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적었는데 물론 이름의 철자는 거의 다 틀렸지만 준비해준 마음이 고마워 집까지 챙겨 왔다. 처음 만나는 자리가 항상 그렇듯 조금은 어색했지만 술과 게임으로 대동 단결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그의 오랜 친구들을 만났다.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다닌 동네 친구들이라고 했다. 내가 그를 알아온 시간은 무척 짧다. 욕심을 내어 더 알고 싶어도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역사를 함께한 친구들을 만나니 그를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얼굴로 친구들과 장난치는 것을 보며 나는 이유 없이 안도감을 가졌다. 그도 그저 한 명의 소년이었고 이제는 어른이 된 남자라는 것과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고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공통의 것을 향유해왔다는 것에.


그런데 나는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어김없이 우울해지곤 했다. 나의 못난 영어실력을 탓했고, 이 언어의 갭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를 더 잘 알고 싶어 할수록 내 앞에 놓인 장벽이 크게 느껴졌다. 연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인끼리 만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많다. 내 영어는 완벽하지 않고 그는 한국어라곤 몇 개의 단어밖에 모른다. 이런 우리가 슬플 때나 화가 나고 서운할 때에도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는 나였다. 나는 어쩐지 행복 속에서도 불행을 찾아 헤매는 사람 같았다.




하루는 둘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꾸몄다. 평소에 잘하지 않던 눈 화장에 귀걸이까지. 예뻐 보이고 싶었고 예쁨 당하고(?) 싶었다. 그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깔끔한 복장에 좋은 향기를 품고 나타났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둘만의 데이트에 들떠 있었다. 시내의 고급스러운 인디안 식당으로 향했다. 연말이었고 도시는 아름다운 조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음식을 시키고 마주 앉아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행복감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제 곧 다시 이별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에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기약이 없는 이별. 우리는 말을 아꼈다. 그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 You said you are interested in studying abroad. Are you still thinking about that?”

(네가 저번에 말했잖아.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아직도 고민 중이야?)


“응. 원래는 영국에 가려고 했는데, 아일랜드의 대학교도 몇 군데 알아봤어.”


“ If it’s because of me, it doesn’e have to be Ireland. What do you want to do in the future?”

(나 때문에 아일랜드를 알아본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나중에 뭘 하고 싶은데?)


“난 심리학에 관심이 많지만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I will visit you in March.”

(내가 내년 3월에 놀러 갈게.)


“정말?”




우선 나는 그가 한국에 올 거라는 말에 정말 기뻤다. 그런데 그가 한국에 올 수 있는 최대 휴가 기간은 3주. 그는 리프레쉬 휴가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건 최대 3개월. 어찌 됐든 우리는 9시간이 차이나는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고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맞잡고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었다. 평범한 데이트를 위해서는 각자의 1년 치 계획 속에서 어떻게 시간을 낼 것이고 그렇게 시간을 내기 위해 어떤 희생을 할 것이며 그 선택의 대가는 무엇일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과 싸워야만 했다.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상대방에게 어떤 요구를 하는 대신 배려하고 있었다는 걸. 어쩌면 우리 관계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는데, 내 마음 한구석엔 나 때문에 이 사람의 커리어가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는 아마 자기 때문에 내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대학원에 간다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을 것이다. 


이게 서로에 대한 배려인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은 요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연인관계라면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쩐지 우리는 그저 서로를 배려한다는 핑계로 미래에 대한 어떤 작은 약속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의 어리석은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




“너는 우리 관계를 얼만큼 진지하게 생각해? 이제 우리 공식적인 커플이 된 거지?”


“Hmmm. I am serious. But There’s no point to make us official now. We will be apart and we don’t know what will happen to us. And we know each other only for a month”

(음… 난 우리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만 지금 우리가 공식적으로 커플이라고 정하는 게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우리는 다시 떨어질 거고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된 지 1달밖에 되지 않았어..)



내 심장은 빨리 뛰기 시작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또다시 내 마음은 무너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기준에서 우리는 이미 연인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심지어 그의 부모와 친척들까지 만났다. 도대체 이 남자와의 연애는 언제 시작할 수 있는 걸까? 혼란스러운 마음을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채 나는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식사 후 펍에 갔지만 나는 그날 밤 혼자 있고 싶었다. 







*3일간의 만남, 9개월의 영상통화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된 이야기를 연재할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은 없어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


1편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lullukumi/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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