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파랑 Nov 05. 2020

시간이 말해줄 거야 #9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나는 며칠 동안 마음을 정리할 수 없었다. 그를 나의 남자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행동들 때문에 후회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의 앞에서 왜 눈물을 보였고, 나의 아픈 마음을 보여줬을까. 왜 그토록 쉽게 마음을 내주고 애정을 표현했을까. 왜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을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


그러다가 그가 밉기도 했다. 내가 좋다던 그 남자는 전여친을 못 잊겠다며 괴로워했고, 서로를 알아가기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고백했고 미래를 위한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잘 몰라서 나를 헷갈리게 한 걸까? 아니면 알면서 나를 가지고 논 걸까?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이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확실한 답이 필요했다. 우리가 연인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리의 만남을 후회하기보단 소중한 추억을 선물해준 그에게 감사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다시 마주한 우리....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그가 입을 떼었다.




"When you go back to Korea would you still want to date with me?"

(네가 한국에 돌아가도 여전히 나랑 데이트할 마음이 있어?)


나는 그의 질문이 참 별로라고 생각했다. 진짜로 내 의견이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아니면 그는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걸 돌려서 이야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너는 어떤데?"


"I think I will not date with anybody. And I wish you the same idea as me.."

(난 다른 사람과 데이트하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너도 같은 생각이면 좋겠어.)


"그래. 우린 연인은 아니지만 각자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 걸로 하자는 거지? 그건 무슨 사이야?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건데?"


"Time will tell."

(시간이 말해줄 거야.)


이 남자는 자신이 한 말에 책임감 따위는 없는 걸까? 아니면 너무 책임감이 강해서 어떤 관계도 쉽게 시작하지 못하는 걸까? 난 또다시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어권에서 date란 한국의 썸타기 단계와 비슷한 거였다. 데이트를 한다고 해서 꼭 연인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사실 저 단어가 굉장히 헷갈렸었다. 왜냐면 우리는 데이트는 하는데 서로를 남친, 여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고백을 하고 상대방이 예스를 하면 그날부터 사귄 지 1일째가 된다. 빠르면 한 달만에도 여보, 남편 같은 애칭을 쓰며 서로가 서로의 것이라는 걸 확실히 한다. 그런데 서양권에서는 남녀 사이를 정의하는 방식이 조금 더 다양한 것 같다. 예를 들면 데이트는 하지만 커플은 아닌 사이. 데이트를 하면서 잠자리도 하지만 커플은 아닌 사이. 이 두 가지 경우는 동시에 여러 명과 데이트를 해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만 상대방과 Exclusive 하게 만나자는 합의를 하면 이때는 서로 하고만 데이트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내다 Official한 커플이 된다. 공식적인 커플이 되기까지 평균 걸리는 시간은 3-6개월이라고 한다. 물론 사람마다 케이스마다 다를 것이다. 


한국에서는 우선 내 남친, 내 여친으로 찜을 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통 100일 전후로 계속 사귈지 관계를 끝낼지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기는 커플이 되기 전에 서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 내가 아는 지인은 그 기간이 5개월이 걸렸단다.


또 하나 알게 된 신기한 사실은 고백하는 문화가 없다. 그럼 남자 친구, 여자 친구가 되는 순간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사람이 타인에게 나를 어떻게 소개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이 친구나 가족에게 나를 지칭할 때 My girlfriend라는 말을 쓰면 비로소 그의 여자 친구가 된 것이다. 나는 이것들을 나중에 인터넷을 찾아보며 알게 됐고, 그제야 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 사이를 정의하지 못한 채 그의 말대로 시간에 맡기기로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일상을 살면서도 그와의 연락이 이어진다면 우린 운명이겠지..?'라고 생각하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사실 더 이상 그의 여자 친구가 되니 마니 하는 것에 마음을 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김이 새버린 콜라처럼 더 이상 설레고 반짝이는 그 무엇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거리감을 두며 남자 친구도 아닌 남자인 친구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임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았다. 얄미울 정도로 나에게 잘해주는 그를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우리의 끝이 무엇인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함께하게 될까? 아니면 이렇게 흐지부지 몇 개월 간의 인연으로 끝이 날까....


"It's already tomorrow. I was so happy that you could come to Dublin again. I look forward to seeing you again."

(벌써 내일이네. 네가 다시 더블린에 올 수 있었어서 너무 행복했어.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게.)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지난 한 달 동안 너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나도 기뻐. 잘 자."


"........"


나는 그에게 마지막 밤의 인사로 포옹을 했다. 어둠 속에서 만져진 그의 눈가는 촉촉했다. 그는 힘들게 굿나잇 인사를 했고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3일간의 만남, 9개월의 영상통화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된 이야기를 연재할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시작만 있고 아직 끝은 없어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지켜봐 주세요:)


1편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lullukumi/25


이전 08화 아직도 남친, 여친이 아니라고? #8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