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그냥 퇴사하겠습니다
퇴사 면담을 하면서 들었던 가장 어이없는 말은 “업무 강도가 낮아서 퇴사하고 싶은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팀장이 이어서 한 말은 “정신없게 일해야 그런 생각이 안들텐데…”였다.
회사가 갑작스럽게 변화를 맞이하면서 나름 중간 그룹이었던 우리 조직은 팀으로 바뀌었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실험한다는 명목과 함께 매우 추상적인 팀 목표가 세팅되었다.
특히 나의 업무는 ‘하고 싶다는 니즈는 있었지만, 해보진 않았던 것’을 새롭게 세팅하고 기획하는 일이었는데 말이 세팅이고 기획이었지,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아 망망대해를 헤매는 돛단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추상적 목표에,
윗분들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분기별 목표,
NEXT TO가 정해지지 않으면 멈추는 실무 상황에
일다운 일을 했다고 할 수도 없어 무력감이 밀려왔다.
남들은 월급루팡 하면서 좀 쉬라고 했지만,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남들 다 바쁜데 나 혼자 멍 때리고 있을 수 없었다.
할 일을 스스로 만들고,
내가 맡은 업무를 분석하고 그 분야에 대해
내가 모르는 건 공부하려고 했으나
순식간에 뒤집히는 손바닥처럼 수시로 바뀌는 목표에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지조차 사라져 갔다.
이대로 가다간 내 커리어도,
이 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진행되는 일들도
의미 있게 진행될 것 같지 않아 결국 퇴사를 선언했고
팀장과의 면담을 진행했다.
팀장에게는 그래도 ‘이 실험이 의미가 없을 것 같다’라고 대놓고 말하긴 그래서, 퇴사하고 싶은 이유에 대해 ‘내 직무와 맞지 않다’라고 설명을 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말이 저 말들이었던 것이다.
정신없게 일을 했어야 퇴사 생각이 안 들었을 거라니…
이건 조선시대 노비에게나 했던 말이 아닌가?
대감님 댁 노비가 도망갈까 봐 ‘정신없게 굴려서 (노비가) 도망갈 생각을 하게 하지 말라’고 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지?
야근을 하든, 정신없이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결국엔 퇴사를 하겠다는 “본질”이 중요한 것 아닌가?
목표가 정해지지 않은 “일”과
방향성 없는 “리더십”의 콜라보.
그게 내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결론 지은 퇴사의 이유인데 이걸 저렇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면 나는 계속 다녔을까? 아니, 결국엔 퇴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정신없다고 해서 이 방향성 없는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생각 없이 일하고, 회사가 주는 월급만 받아가라는 뜻이다.
나는 그런 생각 없는 노비가 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가 무슨 일 하는지는 알고, 내 일에 보람을 느끼며 내가 도전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worker’가 되고 싶은 거지 수동적인 노비가 되고 싶던 건 아니었다.
팀장과의 면담 후 오히려 퇴사를 말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태도로 일하고 싶은지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