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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 Jan 31. 2023

나르시시트 엄마

시들어가는 딸들

한파가 계속되면서 거실 창가에 두었던 화분들을 TV 장 위로 옮겨두었다. 그중 연둣빛 크테난테 루베르시아나는 작년 가을 후배 영에게 선물 받았는데 검지 길이의 작은 촉 하나가 잘 커서 화분 가장자리에 새순이 나더니 지금은 모종만큼이나 커졌다. 화분을 하나씩 싱크대로 옮겨 물을 주는 김에 루베르시아나는 흙을 더 채워 분갈이를 해주려고 구멍이 위로 오게 뒤집었더니 머리카락 같은 뿌리가 그릇모양으로 흙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었다. 빈 화분 두 개에 나눠 심기 전에 양손에 줄기를 하나씩 잡고 떼어내려니 여간 힘을 줘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원 줄기의 삼분의 일이 떨어져 나가고 흙도 소복이 새로 담아서 각각 나눠 심었더니 훨씬 여유 있어 보였다.


분갈이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 영에게 보내주었더니 영은 매우 기뻐하며 여행 중이라고 근황을 전했다. 영이 보내준 사진은 경상북도에 있는 왜관수도원이었다. 엄마와 단둘이 사는 영은 설 연휴에 엄마와 부딪히기 싫어 혼자 피정을 왔다고 했다. 흔히 명절증후군은 주부들의 몫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싱글들의 고충을 자주 접한다. 특히 내 주변에는 엄마와 함께 사는 선후배들이  있는데 아들과 며느리를 대할 때와 함께 사는 딸을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너무 달라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소연했다. 영도 마찬가지였다. 십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는 줄곧 외롭다는 말을 달고사셨는데 몇 년 후 심장수술을 받은 후론 혼자 살다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며 딸을 불러들였다. 사춘기 때부터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은 합가를 원치 않았지만 아이 둘을 키우는 남동생이 맡을 형편은 안되었기에 하는 수 없이 다시 엄마와 살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영은 마흔쯤에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십 년쯤 젊은 나이었고 아빠가 돌아가신 즈음이었다. 영은 이삼십 대에 보수적인 아빠의 간섭 때문에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짧은 치마도 못 입게 하고 귀가시간이 늦어서도 안되고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남자를 만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영은 학창 시절 좋은 성적을 받고 사회인이 되어서는 탄탄한 스펙을 쌓아 부모에게 인정받고 독립하려는 전략을 세웠지만 어떤 성과에도 부모의 간섭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분가를 하고서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하게 되었다.   엄마에게 남자친구의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영이 들은 첫마디는 "턱이 너무 각져서 안된다"는 말이었다.  

어떤 사진의 남자는 나이가 너무 많거나 영보다 학벌이 좋지 않았고, 그냥 못생겨서 부적합하기도 했다. 사실

혼자가 된 영의 엄마는 딸이 남자친구를 만나 결혼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영은 자신의 엄마를 지독한 나르시시트라고 했다. 그가 원하는 건 딸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을 돌볼 사람이었다. 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일상의 외로움을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가 없어서 딸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의 사랑은 부모를 배신하는 일과 같았다. 쉰이 된 영은 자신이 일만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했다. 눈뜨면 학교에 가 선생을 우습게 보는 학생과 학부모를 만나는 일상을 이십 년 넘게 해 왔다고 이제 더는 못 견디겠다고 했다.

딸 가진 엄마들이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딸들이 엄마가 상상하는 인생에서 너무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실은 딸이 어떤 인생을 원하는지에 관해서는 너무 모르는 사람이 엄마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뭘 모른다는 명목으로 딸의 인생을 계획하고 개입하는 엄마들이 바로 딸의 천적이다. 머릿속에는 자신의 안위와 명분만으로 가득 찬 나르시시트 엄마들이 딸의 인생을 잠식한다.


<페르세포네의 납치> Vernini 1621.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이야기가 떠오른다.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에게 잡혀간 딸을 간신히 되찾은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서 붉은 석류알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절망한다. 저승의 열매를 먹은 딸이 일 년의 절반은 지하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딸을 잃은 엄마 데메테르의 슬픔은 아주 처절하게 묘사되는데 비해 페르세포네의 슬픔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가 하데스와 함께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여왕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엄마의 딸이 아닌 온전한 나로 살아간다면 지하세계라 할지라도 그곳이 바로 자신이 머물러야 할 터전일 테니 말이다.

엄마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탯줄을 끊고서 독립된 개체가 되었듯이 성인이 된 딸과 나이 든 엄마는 정신적 탯줄을 끊어야 각자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모성애라는 허울로는 절대로 가려지지 않는 비극이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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